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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의미에서 찾는 인권

모든 사람에게는 수많은 정체성이 있다. 그 정체성은 모두 독립적이지만, 오롯하게 그 정체성 하나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여럿이라고 사람이 나뉜 상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쪼개질 수 없기에 사람은 여러 정체성의 교차점에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정체성이 문제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칠 수는 있지만, 교차점에 있기 때문에 문제 인식의 시작이나 과정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에게 있는 정체성을 살펴보면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것으로 양성애자,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폴리아모리스트 등의 정체성이 있다. 현재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위치에 따른 정체성으로 퀴어 인권 활동가, 지방선거에 출마자로 나섰던 낙선 정치인, 현장에 있지 못한 비정규직 음악교사, 출판사를 차린 개인사업자 등의 정체성이 있다. 그리고 어릴 때를 생각하면 두발 자유를 바라던 학생이었다는 정체성도 있다. 나에게 인권의 인식은 교권이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

교권이라는 말은 내가 교사가 되기 위해 학습한 기본적인 개념과 맞지 않는 의미로 쓰고 있었다. ‘요즘은 학생이 교권을 침해한다’, ‘학교 현장에서 교권이 많이 무너졌더라’는 식이었다. 교권과 짝을 이루는 것은 학습권이고, 교사는 학습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데, 어떻게 학교 현장에 학생 인권이 들어가면 교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교권은 교육자의 권리, 즉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학습 내용을 선정하고, 학습자를 평가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는 말이다. 가르칠 권리가 아닌 교육자로서의 권위라고 하더라도 권위는 능력이 되어야지, 권력이라는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힘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학 개론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교육 철학 중 교육의 정의이다. 이 교육이라는 것이 오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일 먼저 교육과 훈련, 교육과 교화를 비교한다.

교육은 신념 체계의 체계적이며 전인적 변화이며 가치 지향적이다. 반면 훈련은 제한된 기술의 연마이며 기계적 학습과 가치 중립적이다. 교육은 의식과 자발성을 전제로 하며, 내용과 의도에 모두 과정적 준거를 갖고 있다. 반면 교화는 신념을 주입하다 보니 의식과 자발성을 전제로 하지 않으며, 전달하는 내용과 의도에 과정적 준거를 갖지 않는다. 이에 따르면, 교육은 가치를 중심으로 의식과 자발성을 띄어야 하며 체계적이고 전인적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니,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는데 교권이 무너진다면 그건 교육이 맞는가? 교화만 하고 있던 것 아닌가?

그렇다면 교권은 침해되지 않고 있을까? 교권은 침해되고 있다. 전공이 다름에도 교사의 교육 내용을 두고 왈가왈부하며 교사 개개인의 권위와 전문성을 무시하는 관리자가 교권을 침해하고 있다. 교육 내용이나 교사의 정체성 자체를 민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제 삼는 외부자 혹은 학부모가 전문성을 무시하며 교권을 침해하고 있다. 학계나 교육 전문가 집단이 아닌 정부를 중심으로 가치 판단한 것을 교육 내용으로 강요하며 그것을 정치 중립이라 포장하는 정권,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교육부가 교권을 침해하고 있다. 인적 자원이라는 말로 사회적 책임 없이 이익만 좇는 기업이 교권을 침해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교권 침해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마법의 단어와 전문성을 확대하기 위한 싸움을 제한하는 법적 제약을 두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어 교원들이 쉽게 저항할 수 없다. 이에 저항하는 (사회)재건주의라는 미국의 현대 교육 사조도 존재하였지만, 학문보다 가까운 것이 법이고, 법보다 가까운 것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억압의 문제는 풍선을 누르는 것과 같아 모두를 조이면 터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터트리지 않기 위해 한쪽에는 여유를 둘 수밖에 없었는 데, 그것이 구조적인 폭력의 답습이다. 그 폭력을 답습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지위를 통한 개개인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갖다 붙인 이름이 바로 교권이다.


이렇게 교권이라는 말이 오용되면서 각종 인권침해가 다양한 경로로 일어난다. 예컨대 학생들이 교복을 단정하게 입지 않는다, 밖에서 담배를 피운다, 두발 상태가 엉망이라며 학교로 민원을 넣으면, 학교에서는 교사에게 그 민원의 해결을 강요한다. 그러면 교사는 교칙이나 다른 것으로 방어하지 못하면, 관리자의 명령에 따라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칙을 잘 지키도록 만들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선택한다.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이 바로 체벌 혹은 벌점 등의 처벌이다. 이 각종 처벌은 잘못했다고 인식되어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인식되는 사람을 분리시키게 된다. 구조의 변화나 인지적 변화 등 사회적, 교육적 해결이 아니라, 분리와 배제라는 소수자 따돌림 구조의 답습, 비교육적 해결을 부른다. 잘못된 구조 안에서 구조를 변화시킬 수 없게 고립된 교원에게 존재하는 자유는 구조 밖으로 쫓겨날 자유와 구조를 답습할 자유뿐인 것이다.


이런 학생 인권침해의 구조는 당연하게도 교사의 인권 침해를 부른다. 교사에게 역할 모델이라는 큰 책임을 맡긴다. 이 책임은 교사의 권위를 부여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교사는 교칙에서도 그 권위를 위해 교칙에 거의 부합하는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한다. 이 구조에 안에서 완전한 권위를 가진 존재여야만 한다.


이런 교권을 유지해야만 하기에 교사는 어디에서든 공식적으로 피해자로서도, 소수자로서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온전하게 구조 안에서 보편성과 주류성을 가져야 하고, 그 보편성과 주류성만이 품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미 교칙 자체가 교육의 정의에서 벗어나다보니 교칙을 지키게 하기 위해 교사에게 의식과 자발성,  가치 지향적 사고 대신 매뉴얼과 복종의 의무, 가치중립적 사고를 강요한다. 그러다 보니 이미 교육에서 과정적 준거는 형식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이는 이미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자 교화가 되었고, 교사가 주류에 부합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판단이나 행동도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비정규직인 퀴어 교사에게 특정 주류 섹슈얼리티의 두발, 복장 등의 용모를 강요하며, 앞으로의 고용이나 고용 상태에서 불안을 주는 것. 정규직인 성폭력 피해자인 교사에게는 징계를 내리고 악성 민원을 그대로 두며 개인이 오롯하게 감당받게 하는 것. 페미니스트로 성평등을 이야기하는 교사를 악성 민원에 시달리게 두며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그런 것들이 교육계가 교육에서 본질적으로 멀어지고 있는 현실을 나타내는 증상이다.


증상을 하나 둘 없애는 것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인권은 증상을 해결해서 나아질 문제가 아니다. 증상이 일어나는 구조를 고쳐야 나아질 문제다. 그 구조를 고치는 방법은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데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