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날짜와 날씨를 기억한다.


- 2016년 9월 30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4시 반 퇴근 시간이 되어 챙겨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실내에 있다 보니 비가 오는 것을 깜빡하고 우산을 두고 나왔다. 다시 우산을 가지러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교무부장과 마주쳤다.

교무부장은 내게 시간 있느냐고 물었다. 퇴근하고 딱히 할 일은 없어 집에 갈 생각이었기에 시간 있다고 했더니, 밥을 먹자고 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무슨 일인가 의심이 들긴 했지만, 굳이 피할 이유도 없었다. 알겠다고 했더니 곧 챙겨서 갈 테니 먼저 근처에 어느 식당에 가 있으라고 했다.

학교에서 급식을 먹다 보니 굳이 밖에서 사 먹을 일이 잘 없어서 근처 식당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들어가서 뻘쭘하게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5분쯤 기다렸더니 교무부장이 들어왔다. 이야기하자면서 조용한 자리를 찾았다. 약간 막힌 자리로 들어가서 주문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교무부장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다. 들어와서 같이 일하는데 챙기지도 못하고 미안했는데 생각나서 이렇게 밥 먹자고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그때 친구들 이야기를 꺼냈다. 난 살짝 긴장을 풀고 그때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친구 중 게임회사에 들어간 친구 이야기가 나왔다. 게임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더니

"게임 회사에 들어갔으면 게임을 많이 하겠네."

이때부터 이상한 것을 눈치챘어야 했다.

"게임 회사는 게임을 만드는 곳이지 게임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도 게임 회사에 있으면 게임 많이 할 거 아니?"

"업무가 뭔지도 모르지만, 게임 개발하는 것과 게임을 하는 건 다릅니다."

"그런가?"

그렇게 말이 끊어졌다. 교무부장은 화제를 바꾸어 나에게 질문을 했다.

"이건 동료 교사로서 이야기하는 거라. 그래서 내 말을 꼭 따를 필요는 없어. 교사는 각자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거고 성인이니까 아니다 싶으면 안 하는 거지. 말이 좀 나오는 게 있는데, 화장 안 하면 안 될 거? 그리고 커피 수업 시간에 안 마시면 안 될 거?"

"네? 저는 교단을 무대라고 생각하고 무대 분장으로 화장하는 건데요."

"혹시 면접 때도 화장했어?"

"네."

"난 잘 몰랐는데 근데 화장을 꼭 해야 할 거?"

"저는 제 필요에 따라 하는 겁니다."

"젊으니까 패기가 있잖아. 그 패기로 화장 안 하고 한 번 참아봐."

"그게 나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화장을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꼭 해야 할 거?"

"그러면 화장해보십시오."

"허허 화장을 해봐? 그러면 잠깐 다른 이야기 좀 해보자. 쉬는 시간에 바빠?"

"바쁘지는 않습니다."

"안 바쁘면 교무실 왔다 갔다 하면 안 될 거?"

"저 연속으로 수업이 있으면 중간에 쉬는 시간에 정리도 하고 학생들 상담도 하는데요."

"여학생들 조심해라. 여학생들은 친한 척하다가도 언제 말 바뀔지 몰라. 조심해야 해."

"네? 무슨 말입니까? 저는 저 나름대로 중간에 아이들하고 대화만 하면서 조심합니다. 혹시나 음악 진로나 다른 상담 거리 있으면 상담하려는 건데요."

"그래도 여학생들은 조심하고."

"저는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학생하고 대화하면서 고개 숙여 사과도 하고, 문제가 있으면 찾아 고치려 합니다."

"교사를 학생하고 동급이라고 생각하지 마. 다르니까."

"…"

"안 바쁘면 커피는 내려와서 마시면 안 될 거? 우리 학교는 수업 시간에 뭐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든."

"네. 커피 안 들고 가죠."

"그건 시원하게 약속하네. 화장은 아니면서."

"행동을 고치는 건 쉬운 것 아닙니까? 그까짓 커피 굳이 수업 시간에 안 마셔도 됩니다."

"그러면 화장을 꼭 해야겠으면 일단 석 달만 참아봐. 석 달만 참고 정 못 견뎌서 계속 화장해야겠다 싶으면 그때 사직서를 내. 그때는 내가 교장 선생님한테 잘 말씀드릴 테니."

"네? 그러니까 화장을 할 거면 그만두라는 이야기입니까?"

"그런 말이 아니고 좀 타협을 하자는 거지. 일단 밥 먹어."

교무부장의 입에서 나온 단어 '석 달', '사직서' 굉장히 황당한 이야기이다. 석 달이 지나면 방학이다. 방학 때까지 화장하지 말라는 것이고, 방학이 되면 그만두라는 소리이다. 그 전에 그만두는 것은 사람을 구하는 것도 문제고 진도나 평가 때문에 곤란하다. 그러니 학교에 지장 없을 시기를 찾아서 그만둘 시기를 정해준 것이다. 그런데, 이건 퇴사 압박이다. 교무부장이든 관리자든 해서는 안 될 소리이다.

"약속만 해. 성인인데 생각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안 하는 거지. 약속하고 안 지켜도 돼."

"아니다 싶으면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이라고 해도 저는 거짓말을 하기 싫어서 안 한다고 못 하겠습니다. 못 지킬 약속을 하는 것도 제 양심에 어긋나고요."

"화장 안 하면 안 될 거?"

"그런 식이면 여자 선생님들 화장은 문제없습니까?"

"사회는 여성 화장은 괜찮지만, 남성의 화장은 안 좋게 여기다 보니 학생들에게 말이 나올 우려가 있어."

학생들하고 동급으로 여기지 말라면서 학생들에게 말이 나올 우려가 있다며 압박을 주었다. 그 외에도 국가, 사회, 관습 등을 이야기하는데 난 어이도 없고 화도 났다. 앞뒤도 안 맞는 데다 성차별적인 말이 계속 나왔다.

"어느 교육학자가 이야기한 맨박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자다움을 강조할 때 성차별이 심해지니 그런 것을 좀 버릴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난 맨박스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그건 일부의 이야기고. 학교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곳이라. 그러니까 화장 안 한다고 약속만 해."

"약속 못 하겠습니다."

"공무원은 공인이라. 공무원에게는 품위 유지의 의무라는 게 있어. 그래서 품위 유지 때문에 복장도 예전에는 정장만 입었어. 요즘이야 많이 풀렸지만."

말을 계속 돌리면서 내가 화장하지 못하게 하려고만 했다. 내 이야기를 전혀 듣지도 않고, 보수적이라면서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품위유지라고 해도 난 공무원이 아니다. 공무원에 준하는 의무를 가진 비정규직이지만, 순직도 인정 안 되는 기간제 교사이다. 아무튼, 남성이 화장하는 것이 품위와 무슨 관계가 있나 싶은데 품위를 깎는다며 나에게 계속 압박을 주었다.

나중에는 이 지역은 정말 좁다면서 이야기를 했다. 예술제를 언급하며 그것만 잘 넘기면 좋은 소문 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했다. 이건 협박이다. 억압하는 사람이 좁다고 표현하는 것은 협박이다. 피억압자가 좁다고 하는 것과 다른 의미이다.

결국, 난 약속을 하지 않았고, 스트레스받아서 너무 힘들다고 나왔다. 밖에 나오니 비는 그쳤다. 난 비 맞고 싶을 정도로 우울해졌는데, 비도 그쳤다.


- 2016년 10월 1일 아침

아침 전체 모임 시작할 때부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 선생님이 갑자기 이렇게 이야기했다.

"선생님 화장했네요? 남자가 왜 화장을 해요?"

맨날 화장하고 다녔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도 아니면서 인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너무 당황스러웠다. 난 대답도 하지 않고 무시하고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전체 모임이 끝날 때쯤에야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교감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선생님들, 남자 선생님은 남자답게, 여자 선생님은 여자답게, 학생들에게 본을 보이세요."

며칠 전에 했던 성평등 자체 연수에서도 성차별, 성폭력 예방을 위해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강조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연수 자체를 형식적으로 한다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나를 타깃으로 해서 전체가 압박을 주더라도 이건 아니다. 며칠 전 연수에서 한 이야기 마저 엎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 2016년 11월 28일

저 말이 왜 나왔는지 사정을 알게 되었다. 화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수업 중에 거울을 꺼내서 화장하는 남자 교사가 있다는 민원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렇게 저렇게 알 수 없이 꼬여 화장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를 주고 못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된 것이었다.

문제는 화장하는 남자 교사는 나뿐이었다. 수업 시간에 거울을 꺼내서 화장할 이유가 없었다. 수업 시간은 굉장히 바쁘다. 내 진도 나가기도 바쁘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교장의 말에 민원을 넣은 학부모는 우리 아이가 거짓말을 하겠느냐며 화를 냈다고 했다. 일단 교장은 내 화장에 관해서는 예술가라는 이유로 방어했다고 이야기했다. 몇 차례 전화 왔지만, 그냥 욕먹고 말았고, 수업 중에 했다는 것에 그냥 둘 수 없어서 주의를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밑에 전달했다고 했다고 했다.

그 민원의 배경으로 추정되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나에게 "선생님 남자친구 있어요?"라며 성희롱한 학생에게 성희롱이라고 경고했고 그 학생이 반발하며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인데 그게 뭐가 문제냐?"고 한 것에 벌점을 준 것이다. 또 하나는 수업 중 분장 연습 후 교칙 위반을 막기 위해 메이크업 리무버를 갖고 온 김에 화장으로 벌점 받을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 벌점 대신 화장 솜에 메이크업 리무버를 묻혀서 닦게 했다. 이것도 잠깐 하고 하지 않았다. 다른 교사는 그냥 물티슈로 닦게 하지만, 나는 그래도 저게 좀 더 낫겠다 싶어서 메이크업 리무버를 사용했다. 나는 그 두 배경 중 전자를 더 크게 의심한다. 의심을 어떻게 하든 그걸 학생에게 티 낼 수는 없으니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 일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더 미칠 것 같았다. 나도 폭력적이었고, 그 학생과 학부모도 폭력적이었으며, 관리자와 관리자쯤의 위치인 사람도 폭력적이었다. 모두 폭력적이었다. 문제가 전자라면 폭력의 시작은 학생이다. 더 크게 보면 잘못 가르친 어른들이 폭력의 시작이었다. 문제가 후자라면 폭력의 시작은 나다. 교칙이 반인권적이라는 생각에도 동조한 내 잘못이 시작이다.


- 보수의 품위

학교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에 난 동의하지 않는다. 학교는 언제나 끊임없이 학습하며 진보해야 하는 곳이다. 새로운 것을 항상 접하는 학생들 옆에 항상 있고, 교육과정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다문화교육을 하기 위해 소수자의 인권을 공부하는 등 더 진보적으로 열려 있어야 하는 곳이 학교이다.

학교에서 보수적이라는 것은 학습하기 싫다는 핑계, 인정하기 싫다는 핑계에 불과하다. 보수적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를 지칭해서는 안 된다. 안정적인 현재에 부작용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변화에 대하여 더 고민하겠다는 태도여야 한다.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보수적인 것이 아니다. 그냥 게으른 것이다. 진짜 학교에서 보수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면 보수의 품위를 보였으면 좋겠다. 난 계속 화장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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