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생각하게 되는 영화가 있다. 2016년 3월 15일 현재[각주:1] 여전히 흥행하고 있는 영화 『귀향』이다. 이 영화의 이름을 접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경로이다. 귀향 흥행 기록 기사와 왓챠에 단 귀향 코멘트에 댓글이 달릴 때마다 오는 알림 때문이다. 특히 귀향 코멘트에 단 댓글을 볼 때 대부분 한숨이 나온다. 어떻게 읽으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소재의 내용과 유래”에 대한 비난으로 생각한다.

뭐 거기까지는 좋다. 어떤 사람은 팩트가 없다고 하면서 영화를 본 팩트가 없다. 한국 사람을 강조하는 사람은 내 국적을 부정하려 한다. 그것이 정의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의 자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정의는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정의가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나마 『디 워』 때의 수준 낮은 논쟁에 비하면, 최근의 여성혐오 이야기와 페미니즘 이야기 덕에 훨씬 나은 수준의 이야기가 오간다. 그때의 막무가내 애국심에 비하면 다행처럼 보인다.

혹시나 나 말고 또 이런 댓글 달리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았다. 왓챠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비평가들의 이 영화 비판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이동진 평론가의 짧은 평이 세련되게 영화와 소재 둘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이 거의 전부다. 어쩌면 이 영화는 애초에 그렇게 평할 생각도 안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외적 논란이 두렵거나, 볼 가치를 못 느꼈거나.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평가는 어떤 부분을 중심에 두고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외적 의미, 내적 의미, 의도, 표현, 내용, 소재, 주제 등 다양한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외적 의미와 의도, 소재 등 작품 밖에서 애써 좋은 의미를 찾는 것이다. 어떤 예술이든 거기에서만 그치면 상업성 말고 남는 것이 없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한다고 안 좋은 것이 좋은 것이 되지 않는다. 애써 좋은 의미를 부여해도 표현 방식에서 혐오가 작용하면 옳지 않다. 문제가 있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 귀향 비난에 대하여 달리는 왓챠 코멘트

왓챠에는 『귀향』에 대한 감상 별점을 0.5점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코멘트를 달았다. 별점만 남으면 나중에 이유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 삼은 것은 군인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을 군인들이 구하는 서사, 아리랑을 통해 강조하고 반복하는 민족주의적 시각, 성 착취의 전시였다. 정확하게는 아래와 같이 썼다.


내 예상 별점이 4.0이라니… 난 0점 주고 싶다.

군인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을 군인들이 구하는 서사도 역겨웠고, 아리랑을 통해 강조하고 반복하는 민족주의적 시각도 역겨웠다. 굳이 쪽방촌의 성착취를 전체적으로 보여줄 필요도 있었을까? 애써 굿을 하기 위해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고놈의 아리랑이 흘러나와 사람 속을 다 뒤집어 버렸다. 그들의 피해는 민족적인 피해가 아니다. 개인적인 피해이고 사회구조적인 피해이다. 넋을 달래는 것은 그들의 아픔을 달래는 것이다. 그들의 아픔을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민족을 달래려는 그 시도가 굉장히 역겨운 영화였다.


여성으로 추정되는 사람이나 대부분은 “마음에 걸리던 부분”, “공감” 등의 이야기를 하거나 해석에 대한 다양성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한 명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어떻게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인 개개인들의 피해가 민족적인 피해가 아닐 수 있죠?? 시대를 좀 보세요. 위안부야 말로 실은 강점 치하에서 조선인들의 피해와 죽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위안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피해인 세월호 사건만 해도 궁극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인데... 해방된지 겨우 70년 됐는데 먼 옛날 얘기고 내 얘기 아니라 이거죠? 결국 남의 얘기로 치부하니까 이따위로 평가 절하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말 그대로 남이사, 남이 죽든 말든 인 거죠. 민족이라는 거창한 말 필요없이 이웃이 끌려가서 당한 이야기입니다. 1988 쌍문동 이웃이 끌려간 이야기라고 말씀드리면 이해가 좀 쉽겠습니까, 야박하고 매정한 현대인들이여?

덧붙여 위안부가 사회구조적인 피해라고는 하셨는데 저는 동시에 민족적인 피해도 맞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 시대에 친일파 말고 어느 조선인이 자유로웠습니까? 독일 나치에 의한 유대인들의 피해가 민족적인 피해가 아니었나요???


저는 이렇게 야박한 현대인이 되었습니다. 성격이 그렇게 유들유들한 편이 아니라 바로 비꼬면서 민족적인 피해라는 말의 문제를 지적했다.


우와… 민족주의자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위안부는 민족적인 피해라기보다 기지촌까지 이어지는 여성적인 피해이고 사회시스템적인 피해입니다. 여성을 개인의 완전한 인격체거나 사회적 약자가 아닌 소유물로 치부하니까 민족적인 피해라고 하는 거죠. 여성이 민족의 소유물입니까? 거기에 위안부로 중국인까지 등장하는데 그걸 민족적인 피해로 축소하는 것이야 말로 반인권적이고 몰염치한 관점 아닙니까? 어때요? 나도 이렇게 당신의 말이 남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면서 매정하고 인간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개개인을 민족의 소유로 여기고 있고, 가족의 소유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곰곰이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다시 그는 본인의 주장을 번복하지 않은 채 반박을 위한 주장을 덧붙였다.


감독이 어느 부분에서 여성을 민족의 소유물로 바라봤습니까? 이 영화는 그야말로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영화입니다. 민족적인 피해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고요, 아까도 말했듯 사회구조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민족적인 피해입니다. 덧붙여 중국인을 등장시키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등장시킨 것이 오히려 탈민족적으로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실제로 네덜란드인 위안부 피해여성도 실존했습니다) 보편적인 일제의 폭력이고 피해의 역사였다고 말하는 게 보이지 않으시나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또 감정적으로 댓글을 달았다.


영화를 보긴 보셨습니까?

1. 한 번 등장한 중국인을 등장시킨 것이 보편적인 피해의 맥락을 이야기한다고 보기에는 무리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나요? 애초에 등장 안 시키면 모르되 한 명, 그것도 대화도 제대로 안되는 상황을 보편으로 승화한다고요? 그 장면이야 말로 중국인을 소모품으로 삼아 민족적인 피해라고 더 강변하는 장면입니다.

2. 칼로 희롱당하던 은경을 보고 은경의 아버지가 강도를 덮치려다 강도에게 살해 당하는 장면과 아버지를 사랑하던 정민이 일본 군인에 의해 납치 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둘 모두 외동딸입니다. 이런 가부장적 질서의 병렬적인 나열을 통해 민족적 아픔으로 진입을 시도 합니다. 거기다 외동딸이라는 장치를 통해 무엇보다 소중한 아버지의 딸이라는 상징을 만듭니다. 더불어 접신이라는 것을 통해 동일시 하는데, 은경의 몸에 빙의한 것은 정민입니다. 이렇게 두 번째 연결고리를 만들어냅니다. 굿과 광복군의 구출이라는 것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려 합니다. 이렇게 세 번째 고리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에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리랑을 통해 모든 고리를 이어버립니다. 이렇게 다중적 장치를 통해 감독은 보편이 아닌 민족이라고 강변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와 실제 위안부 문제를 섞어서 생각하시다보니 영화의 수준이 낮음을 지적하는 것이 위안부 문제 자체를 피해 간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분리해서 평을 보면 확실히 다르게 느껴지실 겁니다. 그리고 왜 여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평가 점수를 낮게 주는지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며칠 후 뜬금없는 댓글이 하나 달렸다.


실제로 이 증언을 하신 할머니도 미군에 의해 구해진거 아니었나요?


이 글을 읽고 며칠 전에 페이스북에 내 블로그 포스트를 링크한 데에 비슷한 내용의 댓글이 달렸던 것이 생각났다. 내가 단 댓글 내용은 생각나지 않아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최대한 영화와 실화를 분리해보았다.


실화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가 실화를 포장하는 방식의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아픔을 민족과 가족으로 포장해서 피해자의 아픔보다 국가와 민족이 아픈 것이라고 포장해버립니다. 개인에게 사죄하고 보상, 배상해야할 책임은 국가(일본)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사과받아야할 주체는 개인입니다. 국가(대한민국)와 민족이라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상실감과 죄책감, 무력함으로 표현하면서 개인의 싸움을 돕기보다 분노를 분출하고, 개인을 삭히는 데 집중합니다. 전쟁의 주체 자체가 공포인데, 전쟁의 주체만이 해결할 수 있는 양 표현한 것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후로는 열혈 논쟁가들도 지친 건지 관심이 없어진 것인지 몰라도 문제 삼는 댓글은 더는 달리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페이스북에 달렸던 코멘트가 생각났다.



- 영화 『귀향』은 민족주의 성폭력 영화 포스트 링크를 건 페이스북 포스트에 달린 코멘트


페이스북에는 이전에 쓴 글의 링크를 올려서 포스팅했다. 여기 달린 첫 댓글은 이랬다.


내가 아직 안봐서 정확한 비평을 하기 어렵지만 링크한 이 비평은 필자의 표현대로 역겹군...

서사구조 어쩌고 말하는데, 귀향에 나오는 이야기 대부분이 할머니들 진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여부에 대한 확인이 글쓰기와 비평의 기본인데 사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막휘갈겼군.

글쓴이가 역겹고 불편했던 이유는 그것이 민족주의 성폭력 영화라서가 아니라 과거의 슬픈 역사가 부끄러워서 그런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비평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힘겹게 글을 봤는데, 정말 짜증난다. 

사실에 대한 비평(위안부 할머니의 고통이라는 사실과 귀향 영화라는 사실)은 없고 무식해서 불편한 자기 감정 배설 뿐이로군... 에효


솔직히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아직 안봐서 정확한 비평을 하기 어렵지만”으로 시작해서 “사실여부에 대한 확인”과 “사실에 대한 비평”이라는 말을 하며 사실에 대한 예의를 거론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과거의 슬픈 역사가 부끄러워서 그런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말과 “무식”하다는 말까지…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아는 사람과 페이스북에서 댓글 논쟁은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좀 방어적으로 이야기했다.


미안합니다… 제 글입니다…

영화를 보셔요. 진술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 진술을 어떻게 감싸느냐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몫이죠. 그래서 진술과 일치하더라도 포장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죠. 그래서 표현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요.

고통을 표현할 때, 굳이 포르노그래피나 스너프필름을 보여줄 필요는 없죠. 위안부 할머니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은 이 영화에요. 강간 당하는 소녀의 아버지가 강간을 말리다 칼에 맞아 죽는 현대와 나라 빼앗긴 탓에 무력한 일제강점기의 아버지를 병렬로 나열하지요.

과거만 이야기했다면 훨씬 나았을 거에요. 굳이 현대로 끌어들이면서 아리랑으로 마무리 하지 않았다면… 난 여성을 도구적으로 다룬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에요


확실히 누그러진 투로 이야기하면 상대도 누그러지게 이야기한다. 달린 댓글은 이렇다.


귀향을 현재를 보았다면 더 적절한 토론이 가능했겠지. 할머니들이 당했던 일들에 대한 적절한 포장방법을 나는 모르겠더라. 그들이 겪었던 일들을 절절히 느끼게 할려면 그건 포르노 중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포르노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이외의 방식으로 만드는 경우 아무리 잘 표현해도 그녀들이 느꼈던 고통과 절망의 백만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하지...

우린 그녀들의 아픔도 제대로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고 그런 아픔을 제대로 표현하도록 지원하지도 못하고 있지.

글에서 지적했던 것들은 모두 이 두종류 중 하나에 속해 있다. 영화나 영화제작자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사화상이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그런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했고 소화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

저예산과 공론화부족(이해부족) 속에 만들어진 영화지. 난 아에 칼리큘라처럼 더욱 명확하게 만드는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거기 나온 배우들 전부 심리치료 받아가면서 영화찍었다. 여배우들은 잠도 못자면서 영화찍었다더군...


저는 귀향을 보면서 그것을 왜 개개인의 아픔을 민족적 아픔으로 포장했어야 했는지 모르겠어요. 군인만 봐도 기겁해야 할 것 같은데, 군인에 의해 구출되는 장면에서 굳이 아리랑이 나와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메시지를 줘야 했을까요? 주인공이 아버지와 함께 노래 부르던 밀양아리랑도 아니고, 중간에 누가 부른 노래도 아니고 왜 하필 아리랑인 걸까요? 왜 아버지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반복한 걸까요? 중국인 위안부도 나왔는데… 왜 여성 개개인의 그 끔찍한 고통이 아니라 하필 민족으로 승화시키는 건가요…

심리치료 받아가면서 잠도 못자면서 영화 찍었다는 것도 끔찍해요.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 일이라며 누군가 소모된다는 것이 무서워요.


영화를 보고나서 더 정확한 토론이 되겠지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메시지는 할머니들이 받은 피해가 그녀들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문제라는 점의 표현이다. 민족주의적인 표현일 수 밖에 없는 그 표현이 나온건 할머니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부끄러운게 아니라 어린 아이들을 지키지는 못한 나라와 권력자들이 부끄러워 해야한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바로 세우셨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은 정확히 말하면 할머니들이 듣고 싶어 하셨던 말이다.

돈이든 대의든 직간접적인 강요해서 소모한 것이라면 매우 끔찍한 것이겠지. 그들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 너역시 예술가이니 알겠지만 그들이 하고싶어서 한 일에 대해서 옆에서 뭐라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적 강요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끔찍하다고 회피만 할 수도 없고 나는 끔찍해서 못하지만 타인은 다를 수도 있겠지...


솔직히 더 댓글을 달 자신이 없었다. 전의 포스트는 썩 잘 쓴 글도 아니었다. 분명 감정적인 글이었다. 차라리 왓챠에 달았던 댓글이 더 논리적이었다. 영화에서 여성문제와 사건의 폭력적 전시를 갖고 문제 제기했는데, 그 글에 대해 들은 평은 없고, 오로지 실제 사실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나보고 예술가라고 하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 예술가라고?


예술가, 난 예술에 속하는 학문인 음악에 대한 학위를 갖고 있다. 음악학사 딱 하나뿐이다. 그리고 악기 연주를 하거나 작곡, 편곡을 하기도 한다. 더불어 겉으로 보이는 나의 복장 역시 화려한 편이다. 거기에다 자아가 강해서 어디에 가든 충돌이 잦다. 언제나 끝까지 지지 않으려고 해서 더 충돌이 잦다. 그래서 그런가? 주변에서는 나를 볼 때 예술가로서의 인상이 강한 모양이다.

예술가라는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일까? 타인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는 인간일까? 타인이 하고 싶어서 한 일에 대해서 가만히 두는 인간인 걸까? 대의가 따른다고 뭐든 하는 인간인 걸까? 예술이 사회 안에서 예술 행위로서 기능하려면 창작자, 작품 공연자, 관람자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 평가하는 행위도 있다. 예술가는 타인의 예술 행위의 장단점을 분석하거나 문제를 제기하여 반면교사 삼을 기회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이해해야 할까, 예술가이기 때문에 문제를 더 제기해야 할까?

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문제를 더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직업은 직업윤리라는 것을 갖는다. 모두가 합의한 것이 아니어도 각자 직업윤리라는 잣대를 갖고 있다. 나는 목적을 갖는 예술의 존재를 인정한다. 단 그런 예술의 경우 “어떤 목적을 위한 예술을 한다면서 예술을 위해 목적이 되는 존재를 소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잣대로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그 예술에 외부적 목적이 있다면 중간 목표가 있을 것이고, 목표 달성을 염두에 두고 어떤 과정으로 할 것인지 고민이 있을 것이다. 일단 목적이 옳다면,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목표를 설정하든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 목표도 옳다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과정이 어떻든 문제가 없는 것일까? 오랜 시간을 진행하다 보면 목적을 잃고 표류할 수도 있다.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목표 역시 바르게 설정했다면, 그 목표를 위해 어떤 과정을 선택하든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래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작품과 소재를 적절하게 분리하려 노력해야 한다. 소재는 그 자체로 주제가 아니고, 수많은 요소 중 하나다. 소재가 집중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주제를 해치게 된다. 혹은 소재 자체가 목적이나 목표가 되면 소재를 전시하는 데서 그치게 된다. 만약 소재가 인간의 어떤 삶일 경우 재현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가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소재의 분리는 굉장히 중요하다.

목표 중 하나가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고발일 경우 소재의 전시는 고발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쉬운 방법이 된다. 그래서 예술가는 소재의 전시라는 쉬운 선택의 유혹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소재를 전시하지 않고 고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행위는 정말 어렵다. 하지만, 어렵다는 이유로 쉬운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미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길에 소재가 된 존재 혹은 소재를 다루는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다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행위일까?



- 내 비판은 당신의 마음을 판단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감상은 작품과 상호작용하는 주체적인 예술 행위이다. 사람에 따라 작품의 목적, 작품의 내용, 작품의 소재, 작품의 제작 과정 등 작품 안에서 관심을 두는 부분이 다르다. 또한, 살아왔던 삶, 신념, 평소 관심사, 계층 모두 다르다. 그래서 개개인이 작품을 감상한 후, 혹은 감상하며 상호작용하는 사이에 파생되어 나타나는 것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작품 자체가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고발이라는 데서 응원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나처럼 작품 자체가 비윤리적 행위를 전시한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민족적인 정서를 자극하여 민족의 치유에 중점을 두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나처럼 민족적인 정서로 개개인의 피해를 덮는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형태의 상호작용이다.

다른 의견이 나온 것은 똑같이 작품에 대한 다른 형태의 상호작용이 나온 것일 뿐이다. 소재가 된 사람이나 소재가 된 내용을 비난하는 행위가 아니다.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대부분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영화를 본 것은 그 공포에 대하여 전시하는 것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재가 된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기 위해서 본 것이다. 그들은 그 마음에 공감했기 때문에 더 불편해서 비판한 것이다.

나도 비슷하다. 그래서 감독의 표현 방법이 불편했다. 실화라고 해도 극영화라는 예술작품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내내 영화에 대해서만 지적했다. “영화가 실화를 포장하는 방식이 폭력적”이라고 느꼈고,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아픔을 민족과 가족의 아픔으로 포장”하여 “피해자의 아픔보다 국가와 민족의 아픔”으로 바꾼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 영화가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과 2015년 위안부 문제 협상의 폭력성, 밀양 집단 성폭력 사건에서 멋대로 합의해서 돈을 받아 탕진한 아버지의 폭력성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두 협상 모두 “개인에게 사죄하고 보상, 배상해야할 책임은 국가(일본)”에게 있고, “사과받고 배상 받아야 할 주체는 개인”인데, “국가(대한민국)와 민족이라는 공동체”가 멋대로 대신 받고 알았다 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 밀양에서 있었던 집단성폭력 사건 역시 친고죄 조항 덕에 합의 종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2차 피해뿐 아니라, 멋대로 합의해서 돈을 받아 가로챈 아버지가 있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비슷한 모습이다.

그런 협상과 사건들이 있었는데, 아직도 싸우는 분들을 두고 영화는 그 사건을 “상실감과 죄책감, 무력함으로 표현하면서 개인의 싸움을 돕기보다 분노를 분출하고, 개인을 삭히는 데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전쟁의 주체 자체가 공포인데, 전쟁의 주체만이 해결할 수 있는 양 표현한 것”을 보고 이후에도 이어지는 여성을 성적 도구화한 기지촌까지 생각나서 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없었다.

이건 내가 아는 것과 내가 겪은 것, 나의 사고방식에 의한 나의 상호작용이다. 위안부 피해자를 부끄러워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영화 때문에 더 상처받을 사람이 있을까 마음이 더 아팠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대리할 수 없다. 작품도 그들의 아픔을 대리할 수 없다. 작품의 관람도 그들의 아픔을 대리할 수 없다. 작품이 알려진다고 해도 그들의 아픔을 대리할 수 없다. 자칫 주체가 바뀌는 일이 생길까 두려운 것이 내 상호작용의 배경이다.

타인의 상호작용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영화를 보고 느낀 마음이 옳다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영화를 만든 과정을 보고 느낀 마음이 옳다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느낀 영화의 소재에 대한 아픈 마음이 옳다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를 이야기할 때 외적인 요소를 끌어오는 것은 소재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거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당신의 마음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1. 포스팅한 날짜가 아닙니다. 글을 오래 쓰다보니 글 쓰던 중에 기록한 날짜입니다. [본문으로]
  1. 얌마 2016.08.12 16:56 신고

    니가 그냥 관종인거야.

  2. ㅇㅇ 2018.06.01 12:52 신고

    위안부는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민족의 역사인 것도 사실.
    그것을 어느 방향에서 입각하여 본다 한들 개개인의 아픔이 희석되는 것도 아닌데, 굉장히 자기본위 적인 분석이시네요.
    애초에 다른데서 싸운 걸 댓글까지 퍼와서 이리 올리는 걸 보면 성격에서도 자기중심적인 부분이 엿보이고요.
    "내가 맞아"만을 주구장창 반복하고 있는 건 님도 마찬가지인듯.

    • 당연히 자기 본위적인 분석이지요. 원래 객관이라는 것은 굉장히 권력중심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입니다. 그래서 주관적 분석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주도적이지 않고, 객관적인 척으로만 생각하면 세상에 어떤 새로운 생각이 등장할까요?
      내가 맞다고 주장하기 위해 다양한 근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내세우지 않고 나만 맞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토론에서 문제지, 그게 아니면 뭐가 문제일까요?
      저는 아나키스트입니다. 민족 중심의 역사로 보았을 때, 민족이라는 거대한 공동체가 각 지역이라는 작은 공동체, 그 시대 특유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시각에서 바라본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방향에서 본들 개개인의 아픔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겠죠. 하지만, 민족주의적 해석이 경계되어야 할 것은 일본군 위안부 이후 미군기지 중심의 기지촌이라는 성매매 집결지를 국가가 묵인과 방관뿐 아니라 장려했던 것, 일본인의 기생관광을 묵인하고 방관했던 현대사까지 생각하면, 민족의 역사는 그들의 희생을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픔의 전시가 완전히 불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전시하는 방식의 폭력성, 그것을 전시하는 배경에서의 민족적 폭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민족성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대처했었나요? 병자호란 직후에는 환향녀에서 ♪♩♪♪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단어,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알면서도 쉬쉬했던 해방직후,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명목으로 민족의 일꾼이라면서 뒤로는 욕했던 기지촌, 관광산업으로 외화를 벌어들인다며 그대로 두었던 기생관광. 이런 배경이 있는 데도 내셔널리즘을 꼭 강조해야 하는 것일까요?

욕설이 가득한 기사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에는 감정적인 댓글이 많이 달린다(단체로 같은 것을 보면서 성토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휘발성이 강한 말소리와는 다르게 여러 사람이 같은 글을 볼 수 있어 감정이 여러 방향으로 뻗는 모습이 보인다. 조롱부터 잘못 이해한 내용까지 감정적으로 싸우는 댓글뿐 아니라, 다른 시각으로 보자는 내용의 댓글도 종종 보인다. 칵테일 파티 효과인 모양인지 감정적인 댓글이 더 눈에 띈다.

그런 감정 성토의 장인 기사 댓글난은 대체로 몇 가지 내용으로 두어 가지 베댓이 생기는데, 그런 것 없이 대부분 비슷한 내용으로 대동단결하는 기사가 가끔 있다. 내용과 묘사,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 묘사대회에 온 것처럼 묘사의 수준이 베댓을 좌우하기도 한다. 바로 성폭력범의 처벌에 대한 기사이다. 약간의 자비라도 보였다가 온 인류의 자비(를 위한 무자비)를 부정하는 부정한 자로 몰리기도 한다.

보다 보면 세금조차 아까우니 목숨을 빼앗자는 것을 넘어서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잘라내라는 내용도 있다. 이런 내용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신체 손상의 수준으로 경쟁하는 것을 보면 온갖 상상이 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성폭력에 대한 개개인의 두려움과 분노가 크다는 방증이겠지만, 엉뚱한 데 화풀이한다는 생각이 든다.



성폭력의 원인은 발기하는 남성기?

발기하는 남성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발기하는 남성기는 단순한 생리 현상일 뿐이다. 그 발기하는 남성기 자체에는 폭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세시대 마녀사냥의 광기 속에서 클리토리스의 발기와 쾌감을 악마의 젖꼭지라 부르며 마녀의 증거로 삼던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단순한 신체의 반응을 사회적으로 용납하지 않는 일의 당연한 원인으로 삼는 것은 모순이다.

성폭력은 강간이 아니다. 강간은 성폭력의 일부다. 물리적인 행위만이 성폭력이 아니다. 그래서 “성적인 행위로 남에게 육체적 손상 및 정신적·심리적 압박을 주는 물리적 강제력.”이라는 국립국어원의 정의는 매우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정의가 강제추행이나 강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많은 사람이 국립국어원의 권위 덕에 국립국어원의 정의를 단어의 뜻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를 수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일반적 인식이나 실제 법 집행과 동떨어진 정의보다는 실제 법령과 더불어 집행하는 기관의 설명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법무부는 생활법령정보에서 성폭력을 “성(性)적인 행위로 남에게 육체적·정신적 손상을 주는 물리적 강제력으로서 강간이나 강제추행뿐만 아니라 언어적 성희롱, 음란성 메시지 및 몰래카메라 등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서 가해지는 모든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포함합니다.”라고 설명한다. 실제 우리가 마주하는 처벌 가능한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에 가장 가까운 설명이다.

법무부의 설명대로라면 성폭력은 물리적 강제력뿐 아니라 성과 관련한 모든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포함한다. 성폭력에서 발기와 성욕 자체가 물리적으로 유의미한 것은 강간과 강제추행에 한정되어 있다. 강제추행은 발기되지 않아도 가능한 행위이고, 성희롱이나 몰래카메라는 성욕이 없어도 가능한 행위이다. 그래서 성기의 발기 여부와 성욕에 집착하는 것은 실제 성폭력의 범위 자체를 축소할 우려가 있다. 그러면 성폭력을 어떻게 봐야 할까?



성폭력은 성욕의 연장선이 아닌 폭력의 연장선

성폭력은 성욕의 연장선이 아닌, 폭력의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모든 성행위에 강제력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 중 성폭력은 성과 관련한 강제력이 들어가지만, 성행위 그 자체에는 강제력이 아니다. 둘이(혹은 그 이상의 사람이) 서로 좋아해서 한 성행위, 혹은 혼자서 하는 성행위(자위) 자체는 문제 되지 않는다. 성욕 때문이라면 얼마든지 자위라는 성행위로 풀 수 있다.

폭력으로 성적 쾌감을 더 느끼는 사람도 있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다. 약간 차이가 있지만 “강제력을 통한 성적인 자극”으로 쾌감을 얻는 성행위가 존재한다. 그것은 SM이다. SM은 둘 사이에 약속된 강제력을 통해 성적인 쾌감을 얻는 역할 놀이이다. 가학과 피학이라는 역할 놀이를 통해 폭력적인 부분을 자연스럽게 성적인 자극으로 바꾸어 낸다. 강제로 성적인 쾌감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한 강제력을 매개로 서로의 쾌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만약 약속 없이 강제로 어떤 행위를 시킨다면 그것은 폭력일 뿐 SM이 아니다. 다시 말해 SM은 폭력을 흉내 낸 역할 놀이로 통한 성적인 자극을 얻는 것일 뿐이다. 영화나 게임의 역할과 차이가 없다.



성욕 때문이라고?

만약 남성의 분출할 수 없는 성욕 때문에 성범죄가 나타난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여성의 성욕을 부정하고, 남성이 성욕을 독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또한 성욕을 자극하는 모든 형태에 대해 문제 삼을 권리를 갖게 된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핑계에 여성의 옷차림이나 생김새 등에 원인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가해 남성의 핑계도, 피해자를 비난하는 주장의 근거도 되어서는 안 된다. 여성의 주체성과 성을 부정하는 차별이기 때문이다.

만약 가해자가 성도착증이라면 성욕 때문에 저지른 말을 합리화할 수 있을까? 합리화한다 쳐도 화학적거세, 즉 약물치료를 통해 발기를 억제하면 괜찮을까? 발기 억제하는 기간이 끝나면? 발기 억제 자체가 성욕을 안 불러일으킨다는 보장은? 더 나아가서 진짜 거세한다면 괜찮을까?

조선 시대의 환관은 사춘기가 오기 전 고환을 제거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발기됐고, 성생활을 했다고 한다. (단, 사정이 되지 않는 괴로움에 몸을 깨물어 아내들이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렇게 실제 거세한 이들조차 성욕이 있었고 성행위를 했다. 굳이 환관이 아니더라도 성기 성형까지 한 M2F 역시 성욕이 있고 성행위를 한다. 고환 대신 난소가 있는 여성에게 성욕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발기부전일 경우 치료를 받으려는 욕심을 부리기도 한다. 굳이 발기가 아니더라도 성욕이 존재한다는 것은 쉽게 찾을 수 있다.



관점을 바꾸자

이렇게 성욕과 발기에 대해서 강조한 것은 성폭력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싶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망과 신체 현상을 절제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 개인의 욕망과 신체현상이 범죄와 연결고리가 크다고 생각할수록 성범죄 자체를 어쩔 수 없다며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더불어 여성의 성적 자유를 억압할 핑계가 늘고, 성욕의 위계를 만들어 모든 남성은 당연한 예비 가해자, 모든 여성은 당연한 예비 피해자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만약 재범이 문제라면 처벌 강화와 화학적 거세로 눈을 돌리는 것이 우선이 아니다. 교도가 제대로 되는지 그 자체를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교도소가 교도와 사회 복귀에 대한 의지 없이 격리 처벌에서 그치면 재범률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로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 낙인 찍힌 범죄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영원히 잡아둘 수 없다면 그들을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 없이 화학적 거세를 하자는 것은 교도나 사회안전망의 허점을 회피하기 위한 여론 무마용 장치에 불과하다.

교도를 바꾸고,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남성적이라는 말, 여성적이라는 말을 없애야 한다. 너는 이성 같다는 말, 너는 네 젠더 답지 못 하다는 말 속에 있는 젠더 폭력을 없애야 한다. 남성의 욕망을 당연히 풀어줘야 한다는 인식도 없애 하고, 여성의 욕망을 드러내는 데 문제 삼는 것도 없애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젠더 인식을 바꾸어야 이 위계적인 성폭력을 줄일 수 있다.


*덧붙여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 소설 ‘소년의 죄’(http://freshteacher.kim/12)와 다음의 TED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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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성폭력과 관련하여 썼던 단편 소설입니다. 제대로 된 성교육이 없을 때 생기는 문제 중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성폭력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위계와 폭력 때문에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쓴 소설입니다. 예전에 쓰던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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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죄


소년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생겼다. 입가에 보이지도 않던 팔자주름은 점점 골이 깊게 파여 그림자도 함께 짙어졌다.

"끙!"

소년의 목 깊숙한 곳에서 신음이 올라온다. 눈 밑이 조금씩 부풀고 눈꺼풀도 점점 처져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눈 밑 그림자도 짙어져 무척이나 피곤해 보인다.

"아파. 아프다고."

눈 검은자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눈을 조금 찌푸린다.

'누가 있을 리가 없지'

"하아"

소년은 몸을 굴렸다. 몸에 이불이 감겨 불편한 기색이다. 손을 바닥에 대고 상체를 들어올려 몸을 흔든다. 이불이 풀려 조금 편해졌는지 표정이 풀렸다. 가슴을 바닥에 바짝 붙이고 팔을 펴서 손등은 바닥에 댄다. 눈은 질끈 감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후우. 조금만 엎드려 있어야지."

-삑삑삑

알람이 울렸다.

"아 씨."

손을 가슴 앞에 대고 밀어 상체를 들었다. 소년은 무릎을 꿇고 베개에 이마를 쳐박았다.

"일어나라."

"일어났어요."

이불을 걷고 일어섰다. 표정이 좋지 않다. 바지 가운데가 삐쭉 솟아있다.

"으으"

소년은 바지 안에 손을 넣어 팬티를 잡아당긴다. 손을 잠깐 움직이다 떼니 바지가 가라앉았다. 양손을 모두 빼 왼손은 주머니에 찌르고 오른손은 머리칼을 움켜쥔다.

"씨!"

'짜증난다. 쪽팔리게 커지고 난리야. 이래도 튀어나온 게 보이네.'

주머니에 찌른 손을 조금 들어올린다. 머리를 움켜쥔 손으로 머리를 긁는다.

'이쯤하면 안 보이겠지? 화장실까지는…'

머리를 긁던 손으로 방문을 열었다.

"밥 먹어."

"똥 마려워요. 똥 싸고."

소년은 몸을 조금 틀어 화장실로 걸어갔다.머리를 긁던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아, 불을 안켰구나.'

조금 뒤로 물러나 오른쪽 어깨로 스위치를 눌렀다. 화장실 안이 환해졌다.

"훗!"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코웃음을 냈다. 슬리퍼를 신으며 왼쪽 손을 뺐다. 새끼 손가락으로는 왼쪽 콧구멍을 후비고 엉덩이로는 문을 밀어 닫는다.

-쿵, 딸깍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바지 속에 집어넣었다. 왼손 새끼손가락을 콧구멍에서 빼고 새끼손가락만 쭉 편다. 양손 엄지손가락으로 바지를 조금 내리고 뒤로 돈다. 변기 위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코를 후비던 손을 세면대에 문지른다.

'오줌 나올 때 아플텐데… 단단해져서 오줌발도 쓸 데 없이 강할테고…'

"하아"

소년은 한숨을 쉬고 얼굴을 찌푸렸다. 왼손은 머리를 움켜쥐고 오른손은 머뭇거리며 아랫배를 쓰다듬는다.

'짜증나. 눌러야하잖아.'

손을 더 내려 아래를 누른다. 다리를 모아 무릎을 붙이고 손을 뗐다.

"짜증나. 아프기만 하잖아. 씨."

손을 다리 사이로 집어넣어 지그시 누른다.

-쉬

'아 씨, 아파'

"으음. 흑."

-뿌지직

"아아."

팔자주름의 그림자 한 쪽이 더 짙어졌다. 콧구멍이 벌어지고 인중이 짧아진다. 눈 밑이 부풀어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흑."

-쑤욱, 쏴아.

일어서서 팬티를 올린다.

-촥!

경쾌한 소리가 난다.

"아아, 씨."

'아프잖아. 그래도 많이 가라앉았으니 안보이겠지.'

-촤아아

소년은 물을 틀어 손을 대강 씻고 화장실 밖으로 나온다. 소년은 밑에 튀어나온 다리사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아직도…'

소년은 누가 볼까 방으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불 안끌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소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화장실로 가 불을 껐다.

'아 씨. 깜빡할 수도 있지.'

"껐어요!"

"왜 짜증이냐?!"

"엄마가 먼저 짜증 냈잖아!"

"아침부터 화내게 할래?"

"아 뭐! 사람 짜증나게 해놓고 짜증낸다 뭐라 그래!"

"똑바로 하면 짜증날 일도 없잖아!"

"에이 씨!"

-쾅!

소년은 화장실로 들어가며 문을 세게 닫았다.

'짜증나. 보이지도 않잖아.'

-딸깍

"나중에 나올 때 불 꺼."

-하아

소년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래를 봤다. 가라앉은 가랑이를 보고, 바로 문을 열어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착, 딸깍

소년이 밖에 나오자마자 어머니가 말을 했다.

"밥 먹어라."

소년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긴장한 탓에 소년의 이맛살이 팽팽해졌다.

'보고 있는 사람은 없겠지?'

소년은 눈을 굴려가며 두리번거렸다.

"하아"

크게 숨을 들이마신 덕에 어깨가 들리며 가슴이 부풀었다. 주섬주섬, 뒤지는 척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고 다시 두리번거렸다.

"으으!"

얕은 신음을 냈다. 손은 주머니에 찔렀는데 부풀어오르는 것은 가랑이다. 소년의 이맛살에 주름이 생겼다 풀린다. 주름살과 함께 가랑이도 다시 가라앉았다.

-끄응

소년은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버스였다. 노선을 확인하고는 버스에 올랐다. 소년이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두 명씩 앉을 수 있는 곳에는 다 여자 혼자 앉아 있어 부끄러운 마음에 앉을 수 없었다. 맨 뒷줄 가운데 자리는 아래때문에 민망한 일이 생길까 피하고 싶었다.

-이번 정거장은 동…

"아씨"

느껴졌다. 소년은 도리질을 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들 창밖만 보고 있었다. 기회다! 양손을 살짝 부푼 가랑이로 가져가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끄응

"으아."

버스가 갑자기 서는 바람에 소년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얼굴색이 하얗다. 균형을 잡고 얼굴이 붉어졌다.

-삐이

버스 문이 열려 사람들이 내렸다.

"하아 하아."

소년은 갑자기 숨이 가빠왔다. 소년의 어깨가 급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삐이

버스 문이 닫혔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버스 뒷쪽 빈자리를 보고 몸을 틀어 움직였다. 뒤에서 두 번째 좌석 창가에 앉았다.

소년은 앉자마자 목이 뻣뻣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사람도 별로 없고, 안 보이겠네. 아 씨, 왜 자꾸 커지냐? 가라앉긴 했지만.'

"아 씨."

소년은 오른손을 배꼽 아래로 가져가 가랑이를 만져 나중에 커져도 티 안나게 만지작거렸다. 다시 눈치를 살피다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 안심하고 오른쪽 팔꿈치를 창틀에 기댄다. 오른손은 살짝 벌려 엄지와 집게 손가락 사이에 귀를 끼운다. 손바닥은 광대뼈를 받치고 고개는 오른쪽으로 틀어 어깨를 창에 붙인다.

-이번 정거장은…

"흠."

손을 올려 버튼에 댔다.

-삐

다른 사람이 먼저 눌렀다. 소년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일어선다. 아래도 같이 일어섰다.

"윽!"

아까 만져둔 덕에 크게 표는 안 나겠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정거에 휘청이는 척하며 앉아 아래를 살짝 다듬었다.

'이제 됐어. 괜찮겠지.'

소년은 흐트러진 균형을 잡아 흐뭇한 척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내리는 문으로 갔다. 또 느낌이 왔다.

'윽! 또 커진다.'

섰다.

-삐이

문이 열릴 때소년은 촉감을 믿고 아래를 쳐다보았다. 표나지 않는 것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아랫배에 힘을 빡 주고 당당하게 버스에서 내렸다.



'또 꼴렸네. 딸딸이라는 거 한 번 쳐볼까?'

소년은 바지를 내려 손을 가랑이로 가져갔다. 그리고 열심히 문질렀다.

"아 씨, 아파."



"아 씨, 아파."

소년은 자기 바지 가랑이를 꼭 붙잡았다.

"왜? 어디가 아픈데?"

친구의 물음에 소년은 신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끙, 자꾸 선다. 왜 이렇게 아프냐?"

"꼴렸냐?"

"꼴렸냐고? 많이 들어보긴 했어. 근데 그게 뭔데?"

"자지가 발딱 선 거. 그게 꼴린 거야."

"어? 진짜? 아 씨."

소년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얼굴도 찡그린다.

"그럼 딸딸이도 모르겠네?"

"딸딸딸 거리는 차 이야기하는 거 아냐?"

"너 뭐냐? 설명하기는 좀 그런데 그건 아니다. 자지 문지르는 거거든. 다른 말로 뭐라더라? 아, 자위."

"이해가 안 가는데. 그거 왜 하냐?"

"해보면 알아."

'뭘 해보면 알아?'



'이걸 왜 하는 거야? 아프기만 한 걸 해서 뭐해?'

소년은 바지를 올렸다.

"짜증나."

소년은 투덜거리고 가방을 챙겨 문 밖으로 나갔다.



-사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소년은 왼쪽으로 움직여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총무를 보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소년은 고개를 들고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꼬르륵

뱃속에서 나는 소리에 휴대전화를 꺼내어 액정화면을 바라보았다. 6시 30분.

'아, 사람 없을 시간이구나.'

"밥이나 먹어야겠다."

소년은 휘파람같은 소리가 섞여있을 정도로 가늘게 중얼거렸다.

-지잉

'깜짝이야.'

휴대전화 진동이었다. 소년은 휴대전화를 꺼내 액정화면을 바라보았다.

[어디?]

소년의 친구 ㅇ의 문자였다. 고민할 것 없이 바로 독서실이라고 답을 보냈다.

-지잉

[ㅇㅇ]

'뭐냐?'

[뭐냐?]

[거기로간다]

[밥먹을건데언제올거냐]

[밥빨리먹어금방간다]

[ㅇㅇ]

'밥 뭐 먹지?'

소년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사발면에 삼각김밥이나 먹자.'

소년은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으로 들어가 음료수 행사를 하는 삼각김밥 두 개와 음료수 두 개, 사발면 하나를 집어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사발면을 뜯어 스프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바깥이 잘 보이는 바에 앉아 사발면을 내려놓았다. 사발면이 익는 동안 먹기 위해 삼각 김밥 하나를 뜯었다.

'언제쯤 올까? 밥 다 먹을 때쯤 왔으면 좋겠는데…'

삼각김밥 하나를 다 먹었다. 다시 한 개를 뜯으려다 면이 익었나 확인해보았다. 아직 다 안익었지만 아까 먹은 삼각김밥 때문에 목이 매여 국물을 마셨다.

'아 씨, 스프 안 섞였잖아.'

투덜대며 사발면을 내려놓았다. 젓가락으로 면과 국물을 휘저어 스프를 다 녹이고는 뚜껑을 다시 붙였다. 사발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젓가락으로 사발면을 툭툭치며 바깥을 살펴봤다.

'익어라. 익어라.'

젓가락으로 리듬 치는 것은 어느새 시들해지고 사람들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배고파. 아!"

소년은 저도 모르게 나온 말에 스스로 놀라 사발면 뚜껑을 열었다. 라면은 다 불어있었다.

"아 씨."

삼각김밥을 먼저 다 먹으려고 했지만 국물 이 거의 없어 목이 메었다. 갑갑하니 물을 머금어 불어버린 면을 꾸역꾸역 먹었다. 결국 다 삼켰는데 갑갑한 게 없어지질 않아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딱

"바보야 있는 음료수도 안먹고 이게 뭐냐?"

소년의 친구 ㅇ이 왔다. ㅇ은 소년에게 뚜껑을 딴 음료수 하나를 내밀었다.

"아으으아"

소년은 정신 없이 받아 벌컥 벌컥 들이켰다. 목으로 넘기기도 힘들 정도로 가득 머금은 바람에 뱉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음료수를 간신히 삼켰는데, 기침하고 코로도 나오는 바람에 더 고통스러워한다.

"꾸웨엑!"

ㅇ이 소년에게 휴지를 준다. 소년은 한참을 큰소리 내다 좀 가라앉았는지 숨만 헐떡인다.

"고마워."

"가자."

소년은 일어서기 전에 물었다.

"음료수 하나 먹을래?"

"어."

행사로 받은 음료수를 건냈다.

"자."

ㅇ은 받아들고, 편의점 바깥으로 나갔다. 소년은 휴지도 치우고, 테이블로 닦았다. 다 먹은 음료수 병, 라면 국물, 쓰레기를 다 버리고 ㅇ을 따라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ㅇ은 편의점 밖에서 PMP를 들고 뭘 보고 있었다.

"뭐 보냐?"

"야설."

"그게 뭔데?"

"독서실로 가자. 가서 보여줄게."



소년은 책상에 앉아 ㅇ의 PMP에 집중했다.

소년의 표정이 계속 바뀌었다. ㅇ은 소년의 표정을 읽고, PMP를 돌려받아 말을 했다.

"야설 가져가서 볼래?"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USB 있냐?"

소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줘."

소년은 ㅇ에게 USB메모리를 건냈다. ㅇ은 소년의 독서실 컴퓨터에 PMP와 USB메모리를 연결해 복사하고 다시 소년에게 건냈다.

"재밌게 봐라."

"어, 고마워"

ㅇ은 휴대전화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야, 10시 넘었다. 집에 가자."

소년과 ㅇ은 가방을 챙겼다. 어차피 엘레베이터 기다리는 거 오래 걸린다며 둘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독서실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ㅇ은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뭐? 아무튼 이거 읽고 딸딸이 너무 많이 치지 마라."

"안쳐."

"딸딸이 쳐보기는 해봤냐?"

"아프기만 하던데, 짜증나서 안 한다."

"그런가? 난 기분 좋던데"

"그게?"

"특이하네."

소년은 ㅇ의 집 방향으로 걸었다. 바로 가나, ㅇ의 집 쪽으로 돌아서 가나 시간 차이는 얼마 없다. ㅇ은 야설을 보면서 걷고, 소년은 주변을 살피며 야설을 훔쳐보았다.

"진짜 이러냐?"

"그러겠지. 다 왔다. 나 들어가. 잘 가."

"어."

소년은 더 읽다 가고 싶었지만, ㅇ이 집에 들어가는 바람에 입맛만 다셨다.

"쩝."

'아!'

갑자기 USB메모리가 생각난 소년은 집으로 바람처럼 달렸다.



소년은 평소처럼 집에 들어오면 컴퓨터를 바로 켠다. 조용하다 조금 있으면 또 스피커 볼륨을 높여 게임을 한다. 이전보다 청소를 열심히 하고, 조용히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요즘은 팬티만 입은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문 밖에서는 항상 바지를 입고 있다. 방에서 나올 때 다리를 후들후들 떠는 일이 잦아졌다. 소년은 이제 손을 깨끗하게 잘 씻는다.



밤 10시 넘어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ㅇ은 소년에게 말했다.

"애 하나 잡아다 할래?"

"뭘?"

"야설 봤잖아. 해보지 않을래?"

소년은 긍정하지도 못하지만, 부정하지도 못한다. 눈이 떨리고, 몸이 떨린다. 야설로 읽던 것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성폭행을 당하지만 결국 좋아하며 또 하자는 여자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만졌는데 오히려 더 즐기며 따로 데려가 하는 여자들만이 기억난다.

'애 하나 잡아서 하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더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가자"

소년은 대답조차 못하고 ㅇ이 이끄는대로 간다.

'꽉 조이면 그렇게 좋을까? 길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기분일까?'

소년은 ㅇ이 가는 길을 따라 갔다. ㅇ은 자신의 집 방향으로 갔다.

"야 어디 가?"

"어두운 데 찾아야지."

둘은 ㅇ의 집을 지나 더 어두운 동네로 갔다. 이 시간에 누가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꼬마 아이들이 몇 명 보였다. ㅇ이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어느 애 잡을까?"

"진짜 하려고?"

"그러려고 온 거 아냐?"

소년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핑계를 댄다.

"소리 지르지 않을까?"

"살살 꼬셔야지."

"좀 많지 않아?"

"왜 그래?"

"들키면 어떡해?"

"더 어두운 데로 가자."

ㅇ은 소년을 이끌고 더 어두운 곳으로 갔다.

"야, 그냥 가자. 걸리면 쪽팔리잖아. 무섭기도 하고…"

ㅇ은 소년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듯이 방향을 바꾸어 집 근처로 향했다. 소년은 ㅇ을 따라 집으로 갔다.

'아쉽지만, 무서워.'



토요일 저녁, 소년의 가족은 안방에 모여 함께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마침 주말연속극이 끝나고 뉴스를 할 시간이었다. 소년은 드라마를 보고 싶었지만, 채널 이동에 관한 권리가 없다. 자기 방으로 움직일까 했는데 소년의 어머니가 딸기를 씻어 안방으로 갖고 왔다.

"딸기 먹어라."

"아까 냉장고에는 없던데, 웬 딸기?"

"방금 들어오면서 사왔어."

소년은 딸기를 조금씩 베어물었다.

"쯧쯧쯧."

소년의 아버지가 혀차는 소리를 내며 뉴스를 봤다. 소년은 물었다.

"왜? 무슨일인데?"

"봐봐라. 저 쳐죽일 놈."

소년은 뉴스에 집중했다. 초등학교 안에서 초등학생을 강간한 용의자의 생활이 나오고 있었다. 소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곧 이어 나오는 뉴스는 성범죄자 화학적 거세 법안 논란이었다.

"거세하면 새 범죄자는 안 나오나? 범인만 잡으면 뭘해? 치안이 이렇게 엉망인데!"

소년의 아버지는 흥분했다. 소년은 어두운 골목 속에서 뛰어놀던 꼬마 아이들이 생각났다.

-오늘 밤 …

"미친놈들"

-는 아동 성폭력에 대한 대처와 속칭 성범죄자 화학적 거세법안에 대해 보도합니다.

소년은 화장실로 갔다. 다리가 후들거려 슬리퍼를 제대로 신지도 못하고 미끄러졌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고통에 소년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조심해. 괜찮니?"

아버지, 어머니가 달려왔다.

"네, 괜찮아요."

소년은 화장실 불을 켜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변기에 앉아 머리칼을 움켜 쥐었다.

'아 씨, 걸리면 어떡하지? 누가 아는 건 아닐까?'

한참을 고민하다 물을 내리고 나왔다.

"왜? 배탈 났니?"

"네 괜찮아요."

소년은 안방으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봤다. 마침 시사프로그램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성폭력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정신적 고통, 재범율과 약물 치료가 통하지 않는 사례…

'나 그렇게 나쁜 놈이었어? 아냐, 안했잖아. 나는 성충동을 이겨냈어.'

시사프로그램이 끝나고 소년은 다리를 후들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괜찮아, 괜찮아… 나쁜놈은 ㅇ이야.'

소년은 컴퓨터를 켜고 휴대전화를 들어 문자를 썼다.

[개새꺄]

차마 발송하지도 못하고 종료버튼을 눌러버리고 말았다.

'나도 똑같은 놈인 걸.'

부팅이 완료됐다. 인터넷 창을 띄워 게시판, 블로그, 뉴스를 검색했다.

[피해자의 고통… 지워지지 않는 상처,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족에 다시 상처를 주는 것. 약물 치료의 효력이 입증된 것도 아니다. 아동 성폭력은 성충동 보다 약자만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 물리적 거세를 해야한다, 사형을 시켜야 한다, 치안을 강화해야 한다]

'쪽팔리게 나도 저런 사람이 될 뻔 했어? 아니, 고통… 내가 K처럼 애들 괴롭히는 그딴 놈이란 말야?'

소년은 흐느꼈다. 아래에 무슨 느낌이 왔다. 섰다.

"미친… 흐윽…"

소년은 야설을 찾았다. 읽으며 자위를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아파!'

소년은 아픈 데도 계속 했다.

'다 빼야 해. 그래야 그런 짓 안 하지.'

다섯 번째, 핑 돌았다. 색도 이상했다. 소년은 자기 눈이 이상한 줄 알았다. 하지만 비교해보니 붉은 빛이었다.

'피… 나 죽는 건가?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소년은 죽음을 기다리며 자리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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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치마를 입는다. 치마는 특별한 때에나 반강제로 입던 것이었다. 스스로 입기 시작한 지 이제 한 달이 좀 넘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어색해서 청바지 위에 랩스커트로 입었었다. 그렇게 1주일 후 용기를 얻고, 스타킹 내지 레깅스를 신고 치마를 입는다. 이제 남들처럼 치마를 입은 지 3주가 지났다. 이제는 이렇게 치마를 입고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되었다. 그런데 대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난 남성기를 갖고 태어난 인간이다.

길에서 치마를 입고 다니는 것이나 카페에 앉아 있는 것 자체는 사람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나한테 시선이 집중되는 기분도 없다.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나한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걸 알게 된 후로 별로 신경 쓰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 사람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성별을 보더라도 얼핏 보고 판단할 뿐인 것 같다. 그렇게 자세히 뜯어보지 않는다. 파마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곱슬머리에 길이는 어깨 근처. 키도 170cm가 안되는(169cm) 데다 마른 몸이다. 걸친 옷을 보면 아래는 치마, 위는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짧은 니트, 오른쪽을 위로 하여 여미는 재킷까지 자연스럽게 남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다 가방은 성별이 느껴지지 않는 에코백.

그런데 가슴은 평평하고, 어깨는 넓다. 목에도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여성의 특징은 아니다. 하지만 누가 처음부터 그렇게 자세히 볼까? 아는 사람이나 자세히 보고 나서야 “나보다 치마가 잘 어울리고 예쁘다. 어깨만 좁으면 딱인데.” 라는 말을 한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도 중성적인 인상 때문인지 나의 인상을 두고 성별에 대해 내기를 하는 한 쌍을 본 적도 있다. 혼자서 말을 할 일이 없으니 조용히 있었다. 주문한 것을 기다리는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눈치도 분명히 나다. 굳이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상큼한 김선생 고객님, 주문하신 오늘의 커피 나왔습니다.” 내 음료가 나왔다고 알리는 소리에 가서 커피를 받았다. 그때 수군대던 한 쌍 중 남자의 소리 “거봐 여자 맞잖아.” 남자는 신난 표정, 여자는 묘한 표정. 내기했다면 분명 여자 쪽이 이긴 게 맞다. 둘 중 한쪽은 이겼고, 한쪽은 진 게 아닌 것 같은데 라는 표정을 잠깐 보는데, 어이없기도 했고 우습기도 했다.


-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게 뭔가?

아무튼, 평소에 나한테 대놓고 물어보거나 뭐라고 하는 사람 없으니 남의 눈이야 알게 뭔가? 그렇게 치마 입는 것 자체는 거리를 걷거나, 커피 마시러 가도 신경 쓰일 게 없었다. 어머니도 내가 치마 입고 싶어 하고, 치마를 입고 다니는 것을 안다. 여자친구도 알고 있고, 치마를 골라주기도 한다. 주변의 사람들도 치마를 입는 것 자체 갖고 타박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신경 쓰일 게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요 며칠은 스트레스를 좀 심하게 받았다. 육체적인 부분은 없었지만, 성폭력과 성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가 치마 입은 것을 보고 뭐하는 거냐? 남자가 그런 것 왜 입느냐고 하셨다. 분명 두어 번 보셨을 텐데, 신경을 아예 안 쓰셨나? 아니면, 잘 모르셨나?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도 입었었는데? 어차피 어머니는 인정해주시고, 아버지가 화를 내는 것에 대해 나를 그냥 두라고 두둔해주셔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문제는 친구들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 그런데, 몇 명

그런데 요 며칠은 스트레스를 좀 심하게 받았다. 육체적인 것은 아니지만, 성폭력과 성차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내가 치마 입은 것을 보고 화를 내셨었다. 남자가 그런 것을 왜 입느냐고 하셨다. 분명 두어 번 보셨을 텐데, 신경을 아예 안 쓰셨나? 아니면, 잘 모르셨나?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도 입었었는데? 어차피 어머니는 인정해주시고, 아버지가 화를 내는 것에 대해 나를 그냥 두라고 두둔해주셔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문제는 친구들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내가 페이스북에 치마를 입어보겠다고 선언한 글을 올리고, 이후에 입은 사진을 일부러 올렸다. 그렇게 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알기 시작했다. 나를 대하는 것도 별문제 없었고, 치마를 왜 입는지 정도만 물었다.

고등학교 교악대 동문회에 갔을 때도 별일이 없었다. 한 선배는 왜 치마 안 입고 왔느냐? 농담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내가 치마 입는 것에 대해 내 생각을 알게 되면서 치마 입는 것에 대해 지지한다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 생각을 먼저 들어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내가 튀는 사람일 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만난 친구들 모임에서는 달랐다. 처음에는 고등학교 동문회 때와 비슷하게 시작했다. 왜 치마 안 입고 오냐고 시작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놀다가 2차가 되어 아이를 데려온 친구들은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갔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쯤에는 부부관계, 그러니까 섹스 이야기가 나왔다.

성욕이 커지는 시기가 남녀가 각각 어떠니, 남자는 일정 기간에 한 번은 빼줘야 한다느니, 어떤 형태나 도구를 사용한 섹스에 대해서 변태적이라느니, 남자는 빼줘야 한다느니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고자 취급당할까, 트랜스섹슈얼이라 오해할까 싶어 남자는 빼줘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고, 그냥 자위하라고 했다. 어떤 형태나 도구를 사용한 섹스는 변태적이기에 옳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박했다.

집에 갈 때쯤 화재가 나로 바뀌었다. 섹스 이야기가 나왔으니 나로 나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성과 복장. 엄청나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으니까.

어떤 녀석은 “너 그렇게 입고 다니면 따먹힐 수 있다. 내가 아는 게이 형이 있는데, 너처럼 입고 다니는 것 보면 분명 너 따먹을 거다.” 거기에 그럴 리가 없다고 반박했다.

또 다른 녀석은 “너 왜 치마를 입고 다니냐? 성 정체성이 흔들리냐?” 아니, 그냥 입고 다닌다. 나 나름의 성 평등 운동이기도 하고, 치마 입고 싶어서 입는다고 반박했다.

또 다른 말로 “너 스타일이 특이하고 앞서 나가는 건 알겠다. 일본 스타일인 것은 인정하겠는데, 이 동네에서는, 아니 한국에서는 아니다. 여기서는 절대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따먹힐 것이라는 복장이 성폭력을 부른다는 여성혐오에 가까운 전형적인 피해자 탓하기와 특정 성적 지향에 대한 비난. 성 정체성이 흔들리느냐는 타인의 성적 지향, 성별 지향 자체에 대한 비난. 여기서는 아니라는 문화상대주의를 가장한 비난. 이런 성폭력과 성차별을 띄는 비난에 굉장히 힘들었다. 덕분에 며칠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 그래도 계속

나는 스트레스에 좀 약하다. 아니, 스트레스에 약해졌다. 다시 튼튼해져야 한다. 내가 알기에 이런 식으로 성 평등, 성 인식 전환 운동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 나다. 내가 약해지면, 누가 대신 운동해줄 것인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옷을 내 마음대로 못 입으면 그것도 스트레스일 텐데, 좋아하는 일 하고 스트레스받는 게 낫다. 튼튼해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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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버리어 2016.01.05 14:03 신고

    지지합니다. 그리고 저 또한 남성으로서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지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저 또한 치마를 입어볼까 고민해봅니다. 일단 혼자 사는 집에서라도 시작해볼게요. 머리는 기르고 있는데 치마는 더 겁이 나서 입지 않았었거든요. 님의 글 읽고 용기내봅니다.

    • 지지 감사합니다 :)
      치마를 입는 게 부담스러우시면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나 바지 위에 덧입는 것부터 시작해보셔요.
      용기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2. 리니리난 2018.05.08 12:21 신고

    안녕하세요 김선생님 치마를 자주 입고 화장하는 걸 좋아하는 행인입니다. 지정성별은 남성이에요.
    크로스 드레서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의복에 성별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요) 글을 읽으면서 정말 많이 공감됐어요. 특히 전 남자화장실에 들어갈 때 시선이나 사소한 성추행이 굉장히 끔찍했는데 더 나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댓글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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