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민회의 <돌, 바람 그리고 페미니스트 아카데미> 7주간의 일정 중 벌써 5주가 지났다. 한 주에 한 주제씩 이야기를 했는데, 흥미로운 주제 덕에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제까지 했던 강의는 이렇다.

1강 LGTB/퀴어, 비온뒤무지개재단 이사 한채윤님 <동성애 혐오와 한국 개신교의 상관관계>

2강 넷페미니스트,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님 <대한민국 넷페미史 들여다보기>

3강 여성과 노동,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김현미님 <'나'의 노동과 '너'의 노동은 왜 다른가?>

4강 제주 여성, 제주여민회 공동대표 김영순님 <'강인한 제주 여성' 담론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5강 데이트 폭력, 한국여성의전화 전문위원 문채수연님 <나의 연애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1강은 퀴어에 관한 내용인데, '개신교가 왜 동성애에 집착하게 되었는가?'하는 게 주 내용이다 보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용은 좋았지만, 퀴어에 관한 내용이 궁금했던 다른 분들은 조금 당황스러워하기도 했다. 개신교의 동성애 혐오는 교리에 따른다고 보기에는 모순되는 점도 있어서 궁금했는데, 대형 교회를 비롯한 보수 교단의 세력화 중에 필요에 의한 새로운 타깃이 된 것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말씀이 너무 많으셔서 3시간이 부족했다. 의아함과 별도로 강의내용은 흥미진진해서 3시간이 언제 흘렀는지 모를 정도였다.


2강은 대한민국 넷페미스트들의 이야기 중 90년대 영 페미니스트 이야기였다. 이미 권김현영 선생님의 책 대한민국 넷페미史를 읽은 터라. 아는 내용을 반복해서 듣는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흥미롭게 들은 것 같다.


3강은 여성의 노동에 관한 학술적 이야기였다. 신자유주의가 여성 노동과 사회적 재생산에 끼친 영향을 이야기했다. 강의 끝난 후의 질의 응답이 다른 강의보다 길어서 강의 자체보다는 질의응답이 가장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5강은 데이트 폭력의 명명에 관한 이야기부터 실제 데이트 폭력 피해사례와 통계 자료, 한국 사회의 일방적 정조 관념 등을 제시하며 이야기했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것과 관련한 여성의 정치적 위치에 관한 슬픈 이야기였다.


4강은 솔직히 별 기대하지 않았다. '강인한 제주 여성' 담론을 비판적으로 봐봐야 얼마나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신화에서부터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것이 제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부터 현대의 해녀 이야기까지 뒤집어 이야기했고, 제주 여민회가 함께 했던 싸움까지 넓고 깊은 이야기 덕에 이제까지 강의 중 가장 흥미로운 강의였다. 이 강의 내용은 더욱더 여러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1.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강인한 제주 여성

제주를 만든 존재는 여신 설문대 할망이다. 여성이 만든 강인한 여성의 세상이라는 상징성도 있지만, 설문대 할망의 죽음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 중 한 가지를 통해 제주가 가부장제에 물들며 여성이 착취당해가는 모습을 이야기했다. 설문대 할망의 죽음은 물장오리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와 오백장군을 먹일 죽을 끓이다 솥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중 오백장군 이야기는 500명의 아들을 먹이기 위해 죽을 끓이다 죽은 이야기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내용이다. 아들들은 모두 바깥일, 여성은 살림을 한다. 죽을 떠먹는 것도 500명이 각자 뜨지만, 맏이부터 500째까지 순서대로 뜬다. 500째가 죽에서 뼈를 발견하고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되는 이야기이다. 가부장제의 여성과 위계가 모두 나타난다. 또한, 살림을 하다 거기서 죽는다는 것은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희생을 단적으로 상징한다고 했다. 원래의 정확한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제주가 이전과는 달리 여성이 가부장제에 희생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가믄장애기 이야기를 통해 남자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데서 보이는 결혼에서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자청비 이야기를 통해 문 도령이라는 남성에게 지지 않는 여성의 모습과 주체적 연애를 하려는 여성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또한 소를 잡아먹었다고 남편을 쫓아내는 백주또의 모습에서 결혼에 목매달지 않는 독립적인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으로 강인한 제주 여성상이 얼추 맞아 들어간다. 하지만, 가부장제에 희생되는 여성의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다.


2. 강인함과 융합으로 포장한 제주여성의 희생

아이업게 설화 등으로 알 수 있는 성적인 수탈을 사회 참여로 미화하며, 여군이었던 여정을 화살받이로 썼다는 것을 여성이 주체적으로 수행한 국방의 의무로 미화하였으며, 이재수의 난 때 죽임을 당해야 하는 존재인 적진에 보내는 사신을 여성을 보내 희생시킨 것을 주체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것으로 미화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3. 마을 포제와 굿으로 보는 제주의 양면

포제는 유교와 가부장제가 들어오며 남자들만의 행사로 만들었고, 이후 요리와 관련한 노동력이 필요하자, 피 흘리지 않는 여성은 부정 타지 않는다는 이유로 완경된 여성만을 데려와 일을 시켰다. 반면, 굿당에서 굿은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었고, 몇몇만의 폐쇄적인 의식이 아니라 개방적 의식으로 공동체의 행사였다.


3. 삼다도의 신화에서 우근민의 성추행까지 20세기의 제주 여성 착취.

삼다가 실제 존재했던 시기는 굉장히 짧았다. 제주에서 젊은 여성이 많던 시기는 1947~1954년으로 4.3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남성이 살해당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서북청년단의 성 착취, 서북청년단 이후 혼자 사는 여성을 강간하여 작은 각시라는 이름으로 불러 살게 하는 등의 여성 착취가 다양하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 이후로 제주 여성은 정조의식이 없다며 여성혐오적 소문이 돌았다.

관광지로 개발되며 일본인 기생관광이 있었다. 일본인들이 관광지인 제주에서 성매매를 일삼았으며, 이 역시 제주 여성을 희생자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제주 여성 혐오의 근거가 되어버렸다. 이 당시 국내 관광객들도 들어오면서 제주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할 세 가지 바리라며 다금바리, 붉바리, 비바리라며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였다.

비바리는 20대 초 전후 나잇대의 여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청소년 여성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앞에서 관광과 관련하여 성적인 의미로 비바리를 비하했는데, 제주 초콜릿을 개발하며 이름을 비바리 초콜릿으로 지었던 문제가 있었다. 제주도민 외에는 잘 이해를 못 했지만, 제주여민회가 문제를 공론화하며 제주도민들의 반발로 안 쓰이게 되었다.

우근민의 성추행 사건은 제주여민회가 크게 공론화했지만, 도내 정치에서 진보 지식인들의 반한나라당 친민주 의식과 선거를 앞두고 정치 공세라는 오해에 한참을 싸웠다고 했다.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중간에 낙마하고, 2006년에 성추행이라고 판결도 받았지만, 2010년 다시 출마하려고 하면서 이 내용을 숨기고 맞서는 바람에 다시 싸워야 했다.


4. '강인한 제주 여성은 제주 해녀' 신화 걷어내기

일부 연구자의 연구와 달리 제주에서 겪은 해녀는 딸에게 대물림시키고 싶지 않은 힘든 직업이며, 자기 대에서 끝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지리적인 요건으로 봤을 때 제주 해녀가 제주 여성을 대표하기에는 어렵다. 제주 여성의 직업은 해녀 외에도 다양했다. 제주 해녀의 이주 노동을 지우기도 하며, 제주만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은 해녀의 눈이 아니라 타인의 눈으로 해녀를 대상화하는 것이다.

더불어 해녀들이 바다를 지키고 싶어 한다기보다 바다를 메울 때 가장 먼저 찬성하는 모습에서 볼 때 해녀 일은 숭고하기보다 너무 험하고 노동량이 너무 많은 일일 뿐이다. 또한, 해녀의 노동 강도가 센 이유 중 하나가 가족 부양인데, 가족과 지역사회를 위한 인내와 근면, 강인함은 타자화된 여성의 모습이며 제주 여성을 억압하는 또 하나의 담론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필기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기억나지 않는 것도 많다. 중요한 건, 비판적인 시각을 놓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의 학문적 업적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거기서 그치고 후속 연구가 없는 상태에서 현장에 사는 사람이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부의 시각을 내재화하는 것은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일 뿐이다. 이 강의는 나한테 제주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의식화였다. 프락시스가 뒤따라야겠지만, 기억하지 못하면 의식화마저 무너질까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남성이 되기를 주저한다. 나의 성적지향은 양성애(Bisexual)이고, 나의 성 정체성은 안드로진(Androgyne)이다. 그리고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남성이 되기를 주저하는 건 성 정체성과 페미니스트로서의 신념 때문만이 아니다. 내 안에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존재하고, 지정 성별 남성으로 혜택을 받았던 것들이 있다. 난 매개체로써, 도구로써 존재하고 싶지 않다. 나는 오로지 나로 존재하고 싶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단순한 유전자 전달 매개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전자 전달 매개체라고 해도 그건 생명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일 뿐, 내가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것과는 관계없다. 가부장제는 자연 발생도 아닌데 인위적으로 나를 주체가 아닌 매개체로 만든다. 그래서 가부장제가 아직도 공고한 이곳에서 남성이 되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에서 남성은 지배적 성이다. 그래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렇다고 남성이 주체가 되는 건 아니다. 가부장제는 남성도 도구로 만든다. 성(姓)을 전달하는 집안의 명성과 가치를 대물림하거나 일으켜야 하는 매개체나 도구로 만든다.

나는 장남이고 장손이다. 결혼과 재생산은 나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이름으로 씌워졌다. 나에게 어떤 권리가 있냐고 물었을 때, 제사하고 대물림하는 게 권리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나는 그게 어떻게 권리냐고, 그건 의무에 불과할 뿐이라고 맞섰다. 그리고 화가 나서 나는 비혼을 선언했다.

나는 내 유전자를 물려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없다. 내가 결혼을 하든, 누군가와 아이를 만들든, 입양하든 나는 내 정신적인 것을 알려줄 생각밖에 없다. 내가 성과 의무를 물려받았기에 당연히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려준다기보다 나를 알려주고 소통하고 싶을 뿐이다. 굳이 내 핏줄이 아니어도 전달할 수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유지를 잇는 의무를 지우고 싶지 않다. 다음 세대의 삶은 다음 세대가 선택하는 것인데, 그 선택을 못 하게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가부장제는 다음 세대의 삶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가부장제에서 먼저 벗어나기 위해 남성이 되기를 주저한다.

나는 매개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살아가고 싶다. 나의 길은 전달자가 아니다. 나다.

나는 남성이 되기를 주저한다. 나는 성 정체성을 계속 고민 중이기는 하지만, 안드로진(Androgyne)이라고 정체화했다. 남성이 되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비단 성 정체성 때문만은 아니다. 내 안에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존재한다. 남성이 존재함에도 남성이 되기를 주저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로서 가부장제 아래서의 일방적인 남성성이라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신념이 더 크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것 중 하나는 아름다움에 대하는 자세에서 나온다. 남성의 외모를 칭찬할 때는 '멋지다', '멋있다', 여성의 외모를 칭찬할 때는 '예쁘다', '아름답다'라고 한다. 이렇게 성별에 따라 외모를 칭찬하는 말이 다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http://stdweb2.korean.go.kr)(국립국어원의 정의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편견이나 헤게모니를 보여줄 수 있으므로 인용한다.)의 정의를 살펴보자.


멋01 [먿]

「명사」

「1」차림새, 행동, 됨됨이 따위가 세련되고 아름다움.

「2」고상한 품격이나 운치.


아름-답다 [---따]

「형용사」

「1」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

「2」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한 데가 있다. 


예쁘다   [예ː--]

「형용사」

「1」생긴 모양이 아름다워 눈으로 보기에 좋다. ≒이쁘다「1」.

「2」행동이나 동작이 보기에 사랑스럽거나 귀엽다. ≒이쁘다「2」.

「3」아이가 말을 잘 듣거나 행동이 발라서 흐뭇하다. ≒이쁘다「3」.


미14(美) [미ː]

「명사」

「1」눈 따위의 감각 기관을 통하여 인간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

「2」((일부 명사 앞 또는 뒤에 붙어))‘아름다움’의 뜻을 나타내는 말.

「3」『교육』성적이나 등급을 ‘수, 우, 미, 양, 가’의 다섯 단계로 나눌 때 셋째 단계.

「4」『철학』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없이, 내적 쾌감을 주는 감성적인 대상.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는 것에는 보이는 대상, 생김새에 대한 시각적 만족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멋에는 차림새나 행동 따위로 그 사람의 생김새에 대한 것이 들어가 있지 않다. 남성의 생김새는 두고 따로 '잘생겼다'고 하기도 하지만, 타고난 외모에 대한 이야기이지, 꾸민다는 개념 같은 것이 들어가 있지 않다. 보통 여성에게 곱다, 아름다워진다, 예뻐진다는 말을 사용하지만, 남성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그루밍족이 있긴 하지만 잘생겨진다는 말을 쓴다.). 오히려 곱다는 말 같은 경우는 남성성을 부정하는 성희롱이 될 가능성도 강하다.

보통 남성은 명사에서 기본값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지우고 남성을 기본값으로 내세운다. 그 예가 소년(少年)과 소녀(少女)이다. 소년은 어린 시절이라고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남자 어린이를 부를 때 소년이라고 하며, 애써 여자 어린이에게만 소녀라는 명칭을 따로 사용한다. 유년기(幼年期), 소년기(少年期), 청년기(靑年期), 장년기(壯年期), 노년기(老年期) 등 이렇게 나이에 따른 시기를 부르는 말은 비슷하다. 연령을 기준으로 하므로 -년기를 쓴다. 청년은 기본적으로 성년기의 사람을 부르는 말이지만, 성년 남성에 한정해 이야기하고, 성년 여성에게는 혼인 여부에 따라 처녀, 처자, 아가씨 등과 아주머니 이렇게 다른 명칭이 있다. 숙녀처럼 구분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명칭이 많다는 것은 그렇게 구분하는 언어가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 아래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한정되지만, 타자를 가리키는 말은 상황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본값이 여성인 단어가 있다. 바로 미인이다.


미인01(美人) [미ː-]

「명사」

「1」아름다운 사람. 주로 얼굴이나 몸매 따위가 아름다운 여자를 이른다. ≒가인01(佳人)

「2」재덕(才德)이 뛰어난 사람.

「3」『역사』중국 한(漢)나라 때에 둔, 궁녀의 관직.

「비」「1」미녀


물론 비슷한 말로 미녀(美女)가 존재하지만, 현재 남성에게만은 따로 미남(美男)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아름다운 여자, 아름다운 여성이라고는 하지만, 풀어서 아름다운 남성, 아름다운 남자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이 정도로 대상화된 아름다움은 여성에게만 붙인다. 애초에 타자화했기 때문에 기본값이 여성이 된 것이다. 남성에게 미인을 붙인 경우가 없지는 않다.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이 그렇다. 사미인곡에서 미인은 임금이며, 임금은 성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人앞에 美를 붙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현대의 유명한 가요 중 신중현의 '미인' 가사를 살펴보자.


한번보도 두번보고 자꾸만 보고싶네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자꾸만 보고싶네

그 누구나 한번보면 자꾸만 보고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가사 전체가 미인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고 있다. 미인은 주체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여성이 갖추어야 할 아름다움의 대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뷰티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뷰티는 여성의 미용, 화장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루밍이라는 것은 남성의 미용, 화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미 아름다움 자체를 구분하며 여성을 대상화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 남성도 미용을 하지만, 뷰티에 있어 대상은 여성이다. 남성은 따로 용어를 만든다. 남성에게 뷰티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려 한다.

난 남성이 되기를 주저한다. 그래서 내 화장은 뷰티라고 할 것이다. 내 화장품도 뷰티 코너에서 사지, 멘스 그루밍 코너에서 사지 않으니까. 어차피 안드로진에게는 별 차이 없지만, 지정성별 남성으로서 행동은 작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감추어야 하는 것 1

나는 정신과에 다닌 적이 몇 번 있다. 처음은 중학교 다닐 때 성적인 별명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견딜 수가 없어서 상담받으러 다녔다. 두 번째는 대학 졸업하고 불면증이 너무 심해서 잠 좀 자고 싶어서 다녔다. 세 번째는 데이트 폭력과 과로로 누적된 스트레스가 폭발하여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잠도 못 자고 말도 안 되는 죄책감에 시달려서 그걸 해결하기 위해 다녔다. 네 번째는 직장에서 과로와 스트레스 업무로 번아웃 되어서 회복하기 위해 다녔다.

아파서 병원 다니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안부를 묻거나 왜 이렇게 살이 안 찌냐고 물으면 병원 다니면서 약을 먹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신과는 아파서 다녀도 숨겨야 하는 곳이어야 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내가 정신과에 다닌다는 말에 내뱉는 말이 대체로 이랬다.

"젊은 놈이 벌써부터."

"그까짓 게 뭐라고 고생을 안 해봐서 그래."

"그런 거 이야기하는 거 아냐."

"너가 무슨 힘든 게 있다고 그런 데를 다니냐?"

"의지가 부족해서 그래."

이런 말들을 듣고 정신과에 다니는 사실을 잘 이야기하지 않거나 감추었다. 그냥 상담하고 약 받으러 가는 날이면, 오늘은 병원에 간다고만 했다. 많은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면 나에게 어떤 불이익을 줄 것 같았다.


- 감추어야 하는 것 2

나는 불만이 있으면 불만을 잘 이야기한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해서 풀려고 노력한다. 어느 날 조심하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사람들 조심해라, 다 니 편 아니다."

"나 말고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라. 너만 더 힘들어진다."

"너에 대한 말이 많더라. 얼굴 좀 펴고 다녀라."

난 누구도 믿으면 안 됐고, 누구에게도 힘듦을 티 내서도 안 됐다.


- 감추어야 하는 것 3

(…)


- 여성혐오(misogyny)를 알게 되었다.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을 받았다. 단순히 여성을 싫어한다거나 혐오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었다. 여성 일반에 대한 편견을 갖거나 여성을 타자화하는 태도라는 것을 여성혐오라고 했다.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알게 되면서 사회의 여성혐오를 인식할 수 있었다. 내 잘못, 다른 사람의 잘못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감추어야 한다고 강요받거나 겪었던 부당한 일들이 모두 혐오였다. 난 여성혐오라는 단어와 페미니즘을 통해 새로운 언어를 얻게 되었다. 부당함을 지적할 수 있는 언어와 연대의 언어를 모두 얻었다. 차별이나 위협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했고, 연대로 하나씩 바꾸는 것을 보면서 함께 지적하면 바꿀 수 있다는 성취감과 성공의 경험도 얻었다.


- 내가 얻은 연대의 언어 페미니즘

내가 살아가며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가 생겼다. 함께 숨 쉴 수 있는 언어가 생겼다. 위로받고, 위로할 수 있는 연대의 언어는 페미니즘이다.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마음에 공부한다. 내가 감추면서 스트레스받지 않기 위해 공부한다. 모든 차별을 없애기 위한 그 노력을 같이할 수 있다는 마음에 기뻐서 공부한다.

처음에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에 너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적극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내가 완벽하지 않아도 함께 차별을 철폐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뻐서 공부한다.

그리고 그 연대를 다른 데로 보낸다.

- 우연히 내 진짜 욕망을 깨달았다.

치마를 입고 다닌 지 4개월이 넘었다. 나는 내가 그저 치마를 입고 싶어서 입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내 마음 깊은 곳에 권력욕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가족의 장남이며, 우리 집안의 장손인 내가 가부장제를 싫어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단지 장손인 내게 없는 그 빼앗긴 권력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고 화장까지 하는 것이었다.

평소 유입 로그를 살펴보며 검색어를 그대로 넣어 검색해보는 습관이 없었더라면 몰랐을 뻔했다. 오늘 그 검색어 살펴보기 덕에 훌륭한(!) 글[각주:1]을 두 개나 읽게 되었다. 『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를 먼저 보았고, 그 글의 링크를 통해 『구조론 심리학3. 남자들이여, 치마를 입어라! -오세(http://gujoron.com/xe/277606)』라는 글도 접하게 되었다.

앞쪽 링크의 글머리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남녀평등이 점점 구현되고 있는 지구촌에 아직도 남성들에게는 불문율 처럼 금기시되는 사항이 있으니… 바로 치마입기다. 여성들은 이미 남자옷을 다 입고다녀도 괜찮은 세상인데 남자들은 치마를 못입는다. 집안에서 쫓겨나고, 거리에서는 눈총의 대상이 되고…”[각주:2]

그리고 마지막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여하튼 극한도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21세기에도 이러한 터부가 남아있는데 고대시대에는 얼마나 큰 터부로 인하여 인간들이 고통을 겪고 살았을지… 남성들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여성들에게 빼앗긴 권리를 찾을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남자들도 부디 유선형 본능을 되찾을 수 있기를…”[각주:3]

난 이렇게 깨달았다. 내 행동은 여성에게 빼앗긴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이었다.


- 권력자 남성의 특징

그런데 난 집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안 쫓아내시던데? 거리에서는 그다지 눈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 자기 할 일에 바빠 나 같은 존재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난 이미 권력을 가졌나? 으하하하하 우리 가족 최고 권력자가 나라니, 황당해서 웃음 밖에 안 나온다.

글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여성의 옷은 사회에서 상위 계층이 입을 수 있는 옷의 형태이고, 여성의 머리 또한 상위계층이 누릴 수 있는 형태로 보인다.”[각주:4]


“물론 남성들도 머리를 기르던 조선시대까지는, 상투를 틀거나 등등 작게 만드는 기술을 사용하였으나, 일제시대 단발령이 내려지고 엄청난 남성들의 반발이 있었다. 즉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가 그만큼 낮아진다는 것에 반발했던것…”[각주:5]


“권력자 남성 복장의 치마형태는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통털어서 전부다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치마나 긴머리나 모두 우아한 곡선으로 되어있다. 여성의 눈화장도 마찬가지, 마치 유선형의 날씬한 물고기를 보는듯하게 눈화장을 하면, 그것이 사람의 시선을 끈다.”[각주:6]


“치마나 긴머리와 마찬가지로, 화장 또한 고대시대에는 신분의 상징이였을 것이다. 신분이 높은자가 좋은 화장을 하여, 남들이 보기에 낮은 계층과 구분이 된다. 현대사회에서도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남자또한 화장을 하고 출연을 하는것을 보면 이런 추론이 크게 틀린것은 아닐듯 하다.”[각주:7]

난 권력을 가진 자의 상징으로 머리도 기른 것이고, 치마도 입고, 대충이나마 화장을 하는 것이었다! 난 권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 권력도 별 권력이 다 있다.

황당할 뿐이다. 권력도 별 권력이 다 있다. 어떻게 머리 기르기, 치마 입기, 화장하기가 권력이 될 수 있을까?

조선 시대의 머리 기르기는 유교의 영향이 강했다. 효경에 나오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불감훼상효지시야(不敢毁傷孝之始也)를 보자.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몸뚱이 터럭, 살갗으로 사람의 몸 전체를 이야기한다. 이런 몸뚱이를 수지부모(受之父母), 즉 어버이로부터 물려받았다. 불감훼상(不敢毀傷), 감히 상처입히지 않는 것이, 효지시야(孝之始也), 효의 시작이라는 내용이다.

머리 기르기가 권력? 분명, 권력과 아무 관계 없다고는 못 한다. 머리 기르기보다 유교의 가르침이 권력이었다.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며 수백 년을 그게 당연한 듯 살아왔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부정당하니 기분이 어떻겠는가? 나라가 만들어내고 자신도 만들어낸 그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일 것이다. 부모에게 효를 다 해야 하는 세계관이 외부에 의해서 무너지니 한 반발이었지, 머리가 길다고 권력은 아니었다. 머리가 길다고 권력이면 상투를 왜 틀까?

치마 입기가 권력이라는 것은 뒷쪽 링크가 더 가관이다.

“바지는 보통의 남성들이 취하는 삶의 양식을 집약하고 있다. 남성은 기본적으로 잉여다. 김동렬님 말대로 유전적으로 보면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여자의 세력이며 잉여이다. 공동체의 세력을 확장하고 영토를 넓히기 위해 남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차피 단 한 명만 있어도 무방한 잉여이기 때문에  공동체에 의해 마구 소모된다. 주로 전쟁의 형태로 말이다.”[각주:8]

“그들은 마구 소모되니까 옷도 아무렇게 입는다.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데 적합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남성의 옷은 거의 기능 위주이고 실용성이 기준이 된다. 남성 옷은 그야말로 '위하여'의 집합체이다. 멋에 의하여, 아름다움에 의하여. 어울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농사짓기 위해, 사냥하기 위해, 전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각주:9]

소모되기 위해 실용적인 바지를 입혔다고 한다. 바지보다 더 먼저 등장한 실용적 복장은 짧은 치마다. 바지보다 만들기 쉽고 동작의 제한이 적다. 바지는 실용적이지만, 바지 제작과정은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가장 기본적인 패턴과 꿰맬 부분만 보아도 바지가 훨씬 번거롭다. 문화권과 별개로 기술적인 면에서 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권력에 더 가깝다. 말을 타지 않는 이상 실용성은 짧은 치마가 훨씬 높다.

또한, 짧은 치마가 패션 일부가 된 것은 불과 백 년도 안 된 20세기의 일이다. 그 전까지 여성은 동작의 제한이 있는 긴 치마만 입어야 했으며, 그 긴 치마를 입고 가사 노동을 해야만 했다. 전쟁 때 생산 노동자가 부족해지자 여성을 고용했지만, 그것도 대체로 바지보다 치마를 입어야 했고, 바지가 여성의 패션이 된 것은 더 이후의 일이다.

앞쪽 링크로 다시 돌아가 유선형을 권력이라고 끌어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치마나 긴머리나 모두 우아한 곡선으로 되어 있다. 여성의 눈화장도 마찬가지, 마치 유선형의 날씬한 물고기를 보는듯하게 눈화장을 하면, 그것이 사람의 시선을 끈다.”[각주:10]

그 전에 왜 남성은 화장을 안 해도 별말을 듣지 않는지, 왜 현대에도 여성보다 남성들이 덜 꾸미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온갖 미디어를 통해 강요받는다. 여성성과 아름다움이라는 말로 강요받는다. 물론 본인의 선택과 미적 감각 때문에 자신을 꾸미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출근길에 화장하는 여성들은 본인을 위해 꾸미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 꾸미는 것일까? 그 꾸미는 행위가 권력이라면 왜 남성들은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꾸미지 않는 것일까?

앞쪽 링크에서 방송을 예로 들기도 한다. 방송 출연을 위해 화장한다? 정확하게는 분장이다. 극에 등장하는 인물의 특성에 맞게 만들기도 하고, 방송에서 카메라가 비출 때 그 사람의 모습을 뚜렷하게 잡기 위해서 꾸미는 것이다. 방송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 분장이다. 방송에 출연한다고 무슨 권력이 생기는가? 방송을 봐도 돈 더 많이 받는 남성이 분장을 좀 더 적게 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 여성혐오

두 링크는 여성혐오이다. 여성혐오는 한문 글자 하나 만들듯이 해석해야 한다. 혐오라는 개인의 감정을 끌고 오면 끝이 없어진다. 사전에서 보통 “여성에 대한 혐오”라고 정의하는 데, 그 사전의 편찬자가 내린 정의일 뿐 정확한 뜻이 아니다. 학자들이나 정치권에서 사회문화, 범죄 등을 통해 여러 가지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현상을 논의하며 계속 새롭게 정의한다.[각주:11]

단순하게 “나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야기는 여성혐오라는 현상과는 그렇게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혐오감뿐 아니라 성차별, 여성에 대한 부정,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행위, 여성에 대한 편견 등을 모두 포괄하며 남성, 여성 모두에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두 링크는 여성에게 강요했던 여성성을 왜곡하여 설명하고 있다. 머리는 기를 것을 강요받았고, 바지는 못 입게 했으며, 화장은 사회적으로 여성에게만 강요했다. 그것을 특권이라고 하며, 남성이 권리를 빼앗겼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여성혐오일 뿐이다.

졸지에 허울뿐인 권력자가 되었다.


  1. 퍽이나! [본문으로]
  2.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3.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4.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5.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6.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7.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8. <a href="http://gujoron.com/xe/277606" target="_blank" class="tx-link">『구조론 심리학3. 남자들이여, 치마를 입어라! -오세』</a> 중에 [본문으로]
  9. <a href="http://gujoron.com/xe/277606" target="_blank" class="tx-link">『구조론 심리학3. 남자들이여, 치마를 입어라! -오세』</a> 중에 [본문으로]
  10.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11. <a href="https://ko.wikipedia.org/wiki/여성혐오" target="_blank" class="tx-link">위키백과 여성혐오</a> 참조 [본문으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태그가 유행할 당시, 나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썼다. 나는 항상 성 평등을 바라서 작게나마 항상 행동하고 있었다. 일상이나 취미, 업무에서 “그”와 “그녀” 대신 “그”, “학부모” 대신 “보호자”같이 성별이 들어가는 단어를 성별 중립적인 단어로 사용하고, 좌변기만 있는 화장실에서는 좌변기에 앉아서 소변 누기 같이 개인적인 것부터 조심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곳의 소수자 혐오도 보기 힘들었기에 변화를 바라는 마음에 사용했다. 앰네스티의 편지 쓰기나 서명하기처럼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이 한다면 힘이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어디의 차별을 지적하며 고치려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 태그의 유행이 나 자신이든, 세상이든 혹은 또 다른 누구든 긍정적 영향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 서양음악사에서 “여성”음악가

자신 있게 쓸 수 있던 또 다른 이유는 직업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범대 음악교육과 출신의 음악 교사다. 수업과 생활 지도에 대한 고민이 많다. 내가 가진 직업윤리 중 하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차별과 혐오를 내면화시키지 않는 것이다. 옳은 행동만 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내 문제를 알려고 노력하고 반성할 거리를 항상 고민한다. 지금처럼 직장 없이 공부만 할 때는 더욱더 학생들과의 경험을 계속 복기한다.

나는 수업 준비를 정말 열심히 -삽질하며 오래- 했다. 학생들이 내 수업을 지루하게 여기는 것이 싫다.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하고 논문도 필요한 만큼 찾는다. 내 수업을 통해 편견을 갖게 하는 것도 싫고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을 피하고, 강의식 수업이라도 생각하며 참여하는 수업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그래도 내가 준비했던 수업은 다 부끄럽다.

그중 가장 덜 부끄러운 수업은 <서양음악사에서 “여성”음악가>라는 수업이다. 보통 음악사와 감상은 교육과정에서 문화사로 접근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분량이 많아 교과서는 훑어 보게 하거나 음악가 위주로만 제시되어 있다. 그래서 흥미를 주고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주제를 갖고 수업을 만든다. 그중 성차별을 주제로 만든 수업이 <서양음악사에서 “여성”음악가>이다.

이 수업은 학생들도 재미있어했고, 수업이 끝난 후에도 성 평등에 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썩 만족스러운 편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평소에 장난치면서 하는 성차별적인 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다. 그래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라는 태그를 자신 있게 쓸 수 있었다.


- 남성의 페미니스트 선언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

그런데,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태그를 사용한 후에 남성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쓰는 데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봤다. 어떻게 남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이 아닌데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느냐며 좀 더 각을 세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를 페미니스트로 자처하는 데 조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난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그냥 평등주의자? 인권운동가? 그것도 아닌데…

표현할 말을 고민하다 보니 한동안 내 과거의 행동이나 말을 돌아보았다. 어릴 때 나도 모르게 따라 했던 말, 저질렀던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말이나 행동, 이기심에 귀찮아했던 행동 등이 떠올랐다. 선생님 댁에 갔다가 여자 선배와 과일을 같이 깎는데, 나는 예쁘게 깎고, 선배는 별로 안 예쁘게 깎았다. 그때 다른 선배들이 어떻게 여자가 남자보다 예쁘게 못 깎냐고 했던 것도 떠올랐다. 무슨 남자가 그렇게 까다롭고 섬세하냐고 타박하던 것도 떠올랐다.

난 성차별의 덕을 본 남성이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나도 모르게 내면화했던 성차별 의식이나 주변의 모습에 괜찮다고 생각하여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기도 했다. 성차별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덕도 보고 가해자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하나씩 배우면서 조금씩 예전의 행동과 말을 부끄러워하고 하지 않으려 노력하긴 했지만, 난 페미니스트라기에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이후에 반성과 더불어 페미니즘에 관한 공부를 했다. 책과 뉴스, 페미니즘과 관련한 캠페인 영상 등을 통해 조금씩 페미니즘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되었다. 또한, 주변의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덕에 더 많은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나의 각성이 때를 맞춘 건 아닌 것 같은데, 유독 작년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이나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한 이야기를 뉴스에서 많이 보았다. 뉴스나 댓글을 보면서 성 평등을 바라는 사람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성차별의 형태가 굉장히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꼬여 있는 사람 역시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나는 치마를 입는다

그러던 중 치마를 입게 되었다. 스타일-이랄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바꾸어보고 싶어 바지 위에 랩스커트를 덧입으면 어떨까 생각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래서 치마를 찾아보던 중 여성복이라고 판매하는 것 중에 예쁜 옷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도 남성 캐주얼이라고 나오는 것보다 저렴하고, 모양도 다양했다. 니트도 사고 싶어서, 뭘 사볼까 찾아보며 고민하던 중 갑자기 다른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졌다.

그때부터 몇몇 사람에게 말을 꺼내며 상담받았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변태로 보는 것은 아닐까?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할까? 난 내가 남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성전환 생각도 없고, 세상이 여성적이라고 하는 행위는 할 줄도 모르고 할 생각도 없는데. 들은 답은 딱 하나였다. 그냥 입고 싶으면 입으라고. 몇 명은 덧붙여서 이왕 입을 거면 바지 말고 레깅스나 스타킹에 치마를 입으라고 이야기했다.

그런 말들에 용기를 내서 치마를 주문한 후에도 걱정은 여전했다. 내가 크로스 드레서로 살려고 하는 것이었나?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먼저 바지 위에 치마를 입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만나는 사람도 “어차피 남인데” 신경 쓸 필요 있냐고 했다. 성별과 관계없이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싶은 건데, 신경 쓸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지랖과 호기심에 뭐라고 하면 한 마디로 대답할 말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유니섹스? 메트로섹슈얼? 이것도 좀 부족했다. 계속 찾다 보니 젠더 비순응, 젠더 블라인드라는 개념이 나왔다. 순간 유니버설 디자인이 떠올랐다. 그래 난 젠더를 안 보고 싶고, 젠더를 감추고 싶은 쪽에 가까워. 젠더에 관계없이, 몸 형태와 관계없이 뭐든 입을 수 있는 것 아냐?

입다 보니 더욱더 용기가 생기고 편안했다. 그렇게 레깅스에 치마를 입었다. 거기에 용기를 더 내고 무릎 정도 오는 플레어스커트, H라인 미니스커트 등을 사고 편안하게 입었다. 주변 다른 사람들은 잘 어울린다고 하거나 별로 신경을 안 썼다. (아니면 몸매가 되니까 입어도 어울린다는 소리는… 하아)


- 여러 가지가 바뀌었다

그렇게 치마를 즐겨 입게 되다 보니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 모두가 아무 말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등에서 “게이세요?”, “그쪽이었어요?”, “여자가 되려고요?”라는 소리가 나왔다. 어떤 데서는 “너무 앞서 나갔다.” 나는 성별과 관계없이 옷을 입으려는 건데, 너무 앞서 나간 건가? 답답했다. 앞서고 싶어서 앞선 것이 아니라 하다 보니 앞에 있던 건데…

화장실에서 놀라는 사람도 자주 보게 되었다. 이거야 치마를 안 입어도 머리가 길 때부터 있던 일이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이나 겉모습에 관한 생각도 하게 되었다. 트랜스젠더는 화장실에서 불편한 시선을 어떻게 할까? 1인 화장실이면 좀 낫지 않을까?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편한 화장실의 비율로 한쪽만 줄을 길게 서는 일도 줄어들 테고, 화장실에서 불편함도 덜할 텐데.

화장실뿐 아니다. 많은 편견이 겉모습으로 생긴다. 젠더 자체를 당장 없앨 수는 없으니 젠더를 감추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더 억압을 풀지 못하면 젠더를 감추어서 억압에 저항하면 어떨까? 내가 남성이기에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젠더 블라인드라는 말로 표현하면 어떨까?


- 젠더블라인드와 페미니즘

젠더 블라인드라는 말과 치마 입는 남성에 대한 반응을 직접 보고 싶어서 사람도서관 모임을 개설했다. 만남 자리에서 내가 치마 입는 이야기와 젠더 블라인드,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았다. 만남 자리에서 내가 지향하는 부분과 페미니즘 사이에 통하는 부분이 보였다. 내가 하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는 페미니즘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부족한 부분이 있을지 몰라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모임이 끝난 후에 모임에서 했던 이야기를 곱씹어보았다. 그래도 나는 이 사회에서 남성으로서 유리한 부분 때문에 못 보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테니 페미니즘과 관련한 책을 찾기도 하고, 추천받기도 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오면서 잘못했던 부분을 곱씹어 안 하려고 노력하고, 내가 잘못한 것이 있는 것이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공부하며 고민하던 중 ‘한남’인 내가 페미니스트 선언에 동참한 이유』를 읽게 되었다. 잊고 있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태그가 떠올랐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다시 생각해보았다. 치마 입는다고, 불편함을 더 알게 되었다고, 공부했다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언을 통해 내가 자격이 있을지 다시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선언한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자격이 아직 덜 되었다면 갖추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여성이 될 수는 없지만, 나도 모르게 나타날 지 모를 여성성과 남성성의 구분을 피하면서 인차별하지 않으려 노력하겠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성차별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이렇게 선언을 통해 다시 다짐합니다.

  1. 풉!! 2016.08.12 16:54 신고

    보빨러 추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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