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성이 되기를 주저한다. 나는 성 정체성을 계속 고민 중이기는 하지만, 안드로진(Androgyne)이라고 정체화했다. 남성이 되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비단 성 정체성 때문만은 아니다. 내 안에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존재한다. 남성이 존재함에도 남성이 되기를 주저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로서 가부장제 아래서의 일방적인 남성성이라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신념이 더 크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것 중 하나는 아름다움에 대하는 자세에서 나온다. 남성의 외모를 칭찬할 때는 '멋지다', '멋있다', 여성의 외모를 칭찬할 때는 '예쁘다', '아름답다'라고 한다. 이렇게 성별에 따라 외모를 칭찬하는 말이 다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http://stdweb2.korean.go.kr)(국립국어원의 정의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편견이나 헤게모니를 보여줄 수 있으므로 인용한다.)의 정의를 살펴보자.


멋01 [먿]

「명사」

「1」차림새, 행동, 됨됨이 따위가 세련되고 아름다움.

「2」고상한 품격이나 운치.


아름-답다 [---따]

「형용사」

「1」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

「2」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한 데가 있다. 


예쁘다   [예ː--]

「형용사」

「1」생긴 모양이 아름다워 눈으로 보기에 좋다. ≒이쁘다「1」.

「2」행동이나 동작이 보기에 사랑스럽거나 귀엽다. ≒이쁘다「2」.

「3」아이가 말을 잘 듣거나 행동이 발라서 흐뭇하다. ≒이쁘다「3」.


미14(美) [미ː]

「명사」

「1」눈 따위의 감각 기관을 통하여 인간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

「2」((일부 명사 앞 또는 뒤에 붙어))‘아름다움’의 뜻을 나타내는 말.

「3」『교육』성적이나 등급을 ‘수, 우, 미, 양, 가’의 다섯 단계로 나눌 때 셋째 단계.

「4」『철학』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없이, 내적 쾌감을 주는 감성적인 대상.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는 것에는 보이는 대상, 생김새에 대한 시각적 만족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멋에는 차림새나 행동 따위로 그 사람의 생김새에 대한 것이 들어가 있지 않다. 남성의 생김새는 두고 따로 '잘생겼다'고 하기도 하지만, 타고난 외모에 대한 이야기이지, 꾸민다는 개념 같은 것이 들어가 있지 않다. 보통 여성에게 곱다, 아름다워진다, 예뻐진다는 말을 사용하지만, 남성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그루밍족이 있긴 하지만 잘생겨진다는 말을 쓴다.). 오히려 곱다는 말 같은 경우는 남성성을 부정하는 성희롱이 될 가능성도 강하다.

보통 남성은 명사에서 기본값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지우고 남성을 기본값으로 내세운다. 그 예가 소년(少年)과 소녀(少女)이다. 소년은 어린 시절이라고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남자 어린이를 부를 때 소년이라고 하며, 애써 여자 어린이에게만 소녀라는 명칭을 따로 사용한다. 유년기(幼年期), 소년기(少年期), 청년기(靑年期), 장년기(壯年期), 노년기(老年期) 등 이렇게 나이에 따른 시기를 부르는 말은 비슷하다. 연령을 기준으로 하므로 -년기를 쓴다. 청년은 기본적으로 성년기의 사람을 부르는 말이지만, 성년 남성에 한정해 이야기하고, 성년 여성에게는 혼인 여부에 따라 처녀, 처자, 아가씨 등과 아주머니 이렇게 다른 명칭이 있다. 숙녀처럼 구분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명칭이 많다는 것은 그렇게 구분하는 언어가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 아래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한정되지만, 타자를 가리키는 말은 상황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본값이 여성인 단어가 있다. 바로 미인이다.


미인01(美人) [미ː-]

「명사」

「1」아름다운 사람. 주로 얼굴이나 몸매 따위가 아름다운 여자를 이른다. ≒가인01(佳人)

「2」재덕(才德)이 뛰어난 사람.

「3」『역사』중국 한(漢)나라 때에 둔, 궁녀의 관직.

「비」「1」미녀


물론 비슷한 말로 미녀(美女)가 존재하지만, 현재 남성에게만은 따로 미남(美男)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아름다운 여자, 아름다운 여성이라고는 하지만, 풀어서 아름다운 남성, 아름다운 남자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이 정도로 대상화된 아름다움은 여성에게만 붙인다. 애초에 타자화했기 때문에 기본값이 여성이 된 것이다. 남성에게 미인을 붙인 경우가 없지는 않다.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이 그렇다. 사미인곡에서 미인은 임금이며, 임금은 성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人앞에 美를 붙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현대의 유명한 가요 중 신중현의 '미인' 가사를 살펴보자.


한번보도 두번보고 자꾸만 보고싶네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자꾸만 보고싶네

그 누구나 한번보면 자꾸만 보고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가사 전체가 미인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고 있다. 미인은 주체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여성이 갖추어야 할 아름다움의 대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뷰티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뷰티는 여성의 미용, 화장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루밍이라는 것은 남성의 미용, 화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미 아름다움 자체를 구분하며 여성을 대상화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 남성도 미용을 하지만, 뷰티에 있어 대상은 여성이다. 남성은 따로 용어를 만든다. 남성에게 뷰티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려 한다.

난 남성이 되기를 주저한다. 그래서 내 화장은 뷰티라고 할 것이다. 내 화장품도 뷰티 코너에서 사지, 멘스 그루밍 코너에서 사지 않으니까. 어차피 안드로진에게는 별 차이 없지만, 지정성별 남성으로서 행동은 작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귀향을 본 건 개봉한 주 평일 낮이었다. 관객은 반 이상 들어차 있었다. 얼마나 힘들게 개봉했는지 흘러나오던 이야기, 단체 관람을 시켜준 어느 교사 이야기, 소녀상 이야기, 위안부 협정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다른 관객도 나처럼 비슷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앉아 있을 것 같았다. 조명이 꺼지고 비상구 안내가 나왔다.

영화를 보면서 당황했다. 점점 기분이 나빠졌고, 머리도 아파졌다. 아리랑이 나왔을 때 소름이 돋고 구역질이 났다. 그래도 평소처럼 엔딩크레딧 끝까지 화면 보고 있었다. 중간에 울며 나가는 관객이 눈에 들어왔다. 왜 저 사람들은 울면서 나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는지 얼굴 경련에 구역질이 더 올라오는데.


- 귀향에 대한 찬양뿐, 비평은 실종

나처럼 보러 갔다가 끔찍한 기분으로 나온 사람은 꽤 많았다. 하지만 영화 잡지에서는 그 끔찍함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이동진 평론가의 짧은 평 정도가 세련되게 영화의 문제를 지적한 정도였다. 그 외에는 영화 뒷이야기와 영화에 관한 긍정적인 기사만 있었다. 평론가가 아닌 일반 관객들이나 영화전문 사이트에서 댓글로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블로그에 글도 쓰고, 내 평에 대한 비난에 반박하면서 계속 기사를 찾아보았다. 몇 년 전 디 워 광풍과 26년에 대한 학습 때문인 건지, 영화를 볼 필요성조차 못 느꼈던 건지 몰라도 영화 자체에 대한 비평가들의 비평은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더 지나 300만이라는 흥행에도 여러 매체에서 비평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여전히 나오는 것은 얼마나 힘들게 영화를 만들었느냐는 감독 인터뷰, 단체 관람 미담, 출연자에 대한 소식뿐. 그러다 발견한 『[손희정의 영화비평] 어떻게 새로운 ‘우리’를 상상할 것인가』는 가뭄의 단비 같았다. 영화적 텍스트 비판에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논의에 대한 스펙트럼을 줄일 것 같아 아쉬운 부분이지만, 비판적 논의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데 목을 축일 수는 있었다.


- 귀향을 불편하게 여기는 시선

1. 인간을 물건으로 여기는 모습

귀향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 중 하나는 성폭력을 전시하는 장면이다. 그중 최악은 카메라가 하늘로 올라가며 쪽방촌 전체에서 벌어지는 강간을 동시에 보여주는 부분이다. 스너프 필름을 모은 전시회에 온 기분이 들었다. 실화를 묘사한다면, 그 묘사하기 위해 연기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상처는 어디 가서 회복해야 할까? 정신치료를 받으면서까지 묘사를 해야 할까? 아픔을 달래기 위해 했다면, 다른 사람들도 아프게 해야만 그 아픔을 달랠 수 있는 것일까?

맥락적인 당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을 후려치며 벗기는 장면, 초경도 하지 않았다고 실실대는 장면 등 단지 잔인함을 쌓아가며 잔인함의 절정을 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잔인함의 절정 후 각자의 이야기를 전시하듯 지나치며, 또 다른 잔악함의 전시만 풀어가듯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사건이 중첩되며 변화도 없이 쌓이기만 한다. 그 사건이 쌓이며 어느 인물도 변화 없이, 사건의 이유를 만들기 위해 소모적으로 이용하기만 한다.


2. 가부장적 민족주의 서사

또 불편한 부분은 가부장적 민족주의 서사이다. 극은 과거와 현재로 나누어 따로 나누어 진행하는데, 과거와 현재를 잇기 위해 공통점을 부여한다.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다. 여기서도 가부장적 차별이 나타난다. 아버지와 다르게 어머니는 “신비의 영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나마도 과거의 어머니는 복선의 역할이라도 하며 더 큰 의미를 주지만, 현대의 어머니는 아이를 신당에 두고 가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아버지 역시 장치적 역할에 불과하긴 하다. 하지만, 과거의 “아버지를 더 따르는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외동딸과 침략자에게 빼앗겨도 무력한 아버지”와 현재의 “아버지가 사랑스러운 외동딸이 강간당하는 모습에 분노하여 달려들다 죽는 무력한 아버지”라는 형태를 통해 딸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더 강하게 묶어 버린다. 여기에 목숨을 걸고 소녀들을 구출하는 광복군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등장할 때 아리랑을 내보내면서 “조국의 딸”이라는 가부장적 민족주의를 완성한다.


3. 굿을 통한 타자화

굿 또한 불편하다. 굿은 해소하는 역할을 하기보다 가부장적 민족주의를 완성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굿을 통해 이어주는 것은 두 성폭력 피해자이다. 신기가 있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위안부라는 성폭력에 당하고 사망한 피해자를 빙의시킨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는 사죄하고 빙의된 이는 안심시킨다.

그 장면에 앞서 행정 기관에서 “내가 그 미친년이다”라며 생존자가 외치던 장면이 있다. 소리치는 행위를 통해 피해 사실을 숨기고 죄책감에 숨어 지내던 가엾은 이에서 생존하여 사과를 받아낼 주체로서 각성한 그는 이후 미안하다는 사과를 통해 다시 죄인으로 각하된다. 빙의한 이가 괜찮다며 사과를 받아주며 과거와 만나 갈등을 풀지만, 그렇게 성장을 뒤집으며 다시 무력한 개인으로 만든다. 그들의 당당한 주체로 사는 삶을 빼앗아 의존해야 할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 영화 자체를 텍스트로 삼은 비평이 먼저 필요한 이유

이런 불편함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는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그래서 영화라는 텍스트에 대한 비평이 더 필요하다. 진부한 재현에 대한 비판이라는 이유로 텍스트 비판도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귀향이라는 작품이 수많은 시민의 동참이 있기에 가야 할 지향점이 있더라도 텍스트에 대한 비판과 토론 없이 나아간다는 것은 영화라는 예술을 도구 취급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소재가 소재인 만큼 작품과 표현을 온전히 예술적인 문제로만 다루기 쉽지 않다. 표현 그 자체는 도구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 자체를 다양한 시선으로 논하는 행위 없이 분노를 일으키는 정치적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체제 선전 영화와 다를 것이 있을까? 또한, 흥행한다고 우리에게 어떤 힘이 생기는 것일까?

힘들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중요하지 않다. 힘들게 만들지 않은 영화는 없다. 수많은 사람이 온갖 상상을 좋은 목적으로 영화로 만들고자 한다. 힘들게 만들었다는 것은 영화를 보고 이야기할 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관람 못지않게 비평은 중요한 예술적 행위이다. 그 진부한 예술적 행위를 계속하는 것은 창작이라는 예술적 행위의 좋은 밑거름이 된다. 비평가는 관람객을 비평하지 않는다. 작품을 비평한다. 당신이 보는 재미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더 좋은 예술을 위해 비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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