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나와 다른 카페로 가려고 버스를 탔다가 작년에 가르쳤던 학생들을 마주쳤다. 내가 치마 입고 다니는 걸 처음 안 한 학생이 어색하다, 이상하다며 이야기하기에 안드로진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안드로진을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을 모두 갖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보고 바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길지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젠더의 개념과 표현

우리는 모두 어떤 성(Sex: 생물학적 성)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혹은 그와 별개로 젠더(Gender: 사회문화적 성)를 표현한다. 그 표현은 연기에 가까운데, 연기가 몸에 익어 연기인 줄도 모를 뿐이다. 우리는 대부분 성별 이분법(Gender binary) 따라 특정 성별을 연기 혹은 표현하고 있다. 타고난 생물학적 성과 젠더가 일치하는 시스젠더(Cisgender)의 경우 남성은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형태로 젠더를 표현하며, 여성은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형태로 젠더를 표현한다.

타고난 생물학적 성과 (일반적으로 반대라고 부르는) 다른 성의 젠더를 가진 경우 트랜스젠더(Transgender)라고 한다. 이 트랜스젠더는 보통 MTF(Male to Female)라고 하는 트랜스 여성과 FTM(Female to Male)이라고 하는 트랜스 남성으로 구분한다. MTF는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형태로 젠더를 표현하며, FTM은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형태로 젠더를 표현한다. 이들은 많은 경우 호르몬을 맞고 원하는 형태로 성전환 수술을 한다.

다른 트랜스젠더도 존재하는데 이들을 젠더 퀴어(Gender queer, 소수 성 정체성)라고 한다. 성별 이분법에 따르지 않는다고 논바이너리(Non-binary) 트랜스 젠더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에 해당하는 정체성으로는 두 개의 젠더를 가진 바이젠더(Bigender), 세 개의 젠더를 가진 트라이젠더(Trigender), 젠더에 관한 관념이 없는 젠더리스(Genderless), 젠더 정체성이 없는 에이젠더(Agender), 신체를 중성화하기를 원하는 제3의 성 뉴트로이스(Neutrois), 젠더가 유동적인 젠더플루이드(Genderfluid), 모든 성의 정체성을 가진 팬젠더(Pangender), 그리고 나의 성 정체성인 남성과 여성 젠더의 혼합 형태인 안드로진(Androgyne) 등등이 있다.


2. 안드로진(Androgyne, Androgyny)의 뜻과 젠더 표현

먼저 어원을 갖고 설명하면 남성이라는 뜻의 접두어 'Andro'와 여성이라는 뜻의 'Gyne(혹은 Gyny)'를 합한 단어이다. 말 그대로 남성과 여성을 합한 두 성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는 젠더이다. 두 성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으니 성별 이분법에 따른 구분이 어렵다. 젠더 표현부터, 호칭, 신체까지 두 성의 특징을 모두 갖거나 두 성의 구분이 모호하다.

안드로진은 복장, 행동과 같은 젠더 표현을 지정 성별[각주:1]의 전형적인 형태로 나타내지 않는다. 성의 구분이 모호한 패션이나 두 성의 특성을 모두 나타내는 옷을 입는다. 나 같은 경우 치마와 블라우스 입기를 좋아해서 치마와 블라우스를 자주 입는다. 나는 옷 자체에 성별을 부여하지 않고 입기 때문에 지정 성별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고 모호하거나 어색해 보일 수도 있다.

호칭의 경우 신경 쓰는 사람은 성별 호칭을 불편해할 수도 있다. 지정 성별 남성 안드로진의 경우 형, 오빠, 삼촌,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같은 호칭, 지정 성별 여성 안드로진의 경우 언니, 누나, 이모, 고모 같은 호칭 등 성별이 강하게 드러나는 호칭을 불편해할 수 있다. 나는 호칭에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내 지정 성별 그대로 형, 오빠라고 불러도, 다르게 언니, 누나라고 불러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성별과 관계없는 김 선생님 호칭이 가장 마음에 들고 마음이 편안하긴 하지만, 상대의 버릇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신체의 경우 그대로 두는 안드로진도 있고, 변형시키는 안드로진도 있다. 지정 성별 여성인 안드로진의 경우 유방을 축소하는 수술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지정 성별 남성인 안드로진의 경우 호르몬이나 수술로 유방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신체 변형에 관심이 없는 안드로진은 다른 형태의 젠더 표현만 신경 쓰거나, 아예 신경을 쓰지 않기도 한다. 나는 유방을 만들어 성별 인식을 좀 더 모호하게, 혹은 양쪽을 모두 드러내고 싶어 하는 쪽에 속한다.


3. 안드로진의 성적 지향

안드로진에게는 이성애나 동성애라는 표현이 어렵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이성애라는 말과 동성애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 대신에 남성애, 여성애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 외의 성적 지향인 무성애, 양성애(혹은 다성애), 범성애는 다른 젠더와 똑같이 표현할 수 있다. 안드로진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성적 지향이 굉장히 여러 가지이다. 내 성적 지향은 양성애이다. 문제는 얼빠라… 남들 보기에는 여성애로 보기 쉽다.


4. 안드로진으로 정체화하기

안드로진이라는 말이 생소하다보니 안드로진이라는 정체성을 알기 전에 MTF 혹은 FTM이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한다. 논바이너리 정체성 자체를 알기도 힘들다 보니, 그나마 알려진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등으로만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젠더 퀘스쳐너리로 살다가 인터넷 검색 등으로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사람을 찾다가 논바이너리 정체성을 알면서 스스로를 대입하며 정체성을 찾는다.

내 정체화 과정은 좀 독특한 편이다. 나는 복장에 젠더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성평등 운동으로 치마를 입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때야 마음이 편안해지며 성적 지향을 알리거나 알려지는 것에 관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간신히 젠더에 관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지정 성별 남성으로 태어나서 남성 젠더 표현만으로 살기 불편한 부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안드로진으로 정체화한 지금에 와서야 그 불편함이나 어색함을 이해하고 있다.

난 분명 어릴 때부터 안드로진의 기미가 느껴졌다. 난 화장이나 여성복이라고 생각하던 옷에 대한 욕망이 있기도 했다. 바지만을 입는 데 불만이 있었고, 여성의 신체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한 편으로 지금 신체를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성별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신체에서 큰 변화를 바라지도 않았다. 또 가부장적 남성을 굉장히 어려워하거나 가부장제를 두려워했고, 남성은 이래야 한다는 규범도 너무 힘들었다. 남성보다는 상대적으로 유연한 여성이 편했는데, 여성과도 거리감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다른 점, 같은 점을 굉장히 다양한 데서 부분 부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건가 고민도 했고, 무엇일까 여러 가지 고민해봤는데, 난 남성과 여성 모두의 특징이 있고, 더 갖고 싶어 했다.


5. 내가 고민했던 젠더

나는 MTF 일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내 젠더에 의문을 품는 퀘스쳐너리 상태와 데미 메일(Demi male) 그러니까 반 남성 정도로만 생각해봤다. 젠더 플루이드라기에 나는 내 젠더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고, 바이 젠더라기에는 두 성이 또렷하지도 않았다. 나는 제3의 성이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성기를 없애고 싶은 욕망은 없었으니 뉴트로이스도 아니었고, 젠더가 없다는 생각도 안 했으니 에이젠더나 젠더리스도 아니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빼다가 안드로진에 관한 개념에 내 속에서 명확해질 수록 나는 지정 성별 그대로인 시스젠더가 아니었다. 안드로진이었다. 고민은 내 정체성과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불명확한 개념들을 소거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6. 나는 안드로진이다.

나는 안드로진이다. 짧게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이렇게만 이야기해도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내 젠더 표현이 내 주변을 넘어 전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너무 나중은 힘들다.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당장이었으면 좋겠다. 내 정체성은 지금의 정체성이다. 나중의 정체성이 아니다. 그런 만큼 내 인권도 지금 챙겨야 할 인권이다. 나중에 챙겨도 되는 그런 인권이 아니다.

  1. 사회에서 지정한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성별이다. 주민등록번호 뒤 7자리 중 첫 번째 숫자가 홀수면 남자 짝수면 여자인데, 9와 0은 19세기에 태어난 남성과 여성, 1과 2는 20세기에 태어난 남성과 여성, 3과 4는 21세기에 태어난 남성과 여성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요즘 매일 #오늘의미모 라는 태그로 화장한 후의 모습을 셀카로 찍어 올린다. 상의로 블라우스를 입기도 하고, 셔츠나 후드티를 입기도 한다. 가끔은 다른 사진도 올린다. 전신을 찍을 수 있는 거울이 있으면 전신을 찍어 올린다. 스타킹 신고 반바지 입은 모습을 올렸을 때 이런 메시지가 왔다.

"선생님 예전의 멋있는 모습은 어디 갔나요?"

내 답은 '난 언제나 멋있는데?'였다. 난 내가 꾸미는 행위를 즐기고, 내 삶을 당당하게 살아간다. 얼마나 멋진가? 난 부끄럽게 살지 않는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오늘의미모 셀카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너 왜 계속 그러고 다니냐?, 왜 계속 여장하고 다니냐고 한두 번은 장난인 줄 알았다."

좀 당황스러웠다. 나는 여장한 적이 없다. '이게 뭐가 여장이에요?'라고 답하긴 했지만, 전에 겪었던 나보고 미쳤다고 한 녀석이 생각나 글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여장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여장02(女裝) 「명사」 남자가 여자처럼 차림. 또는 그런 차림새.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반대말 남장01(男裝) 「명사」 여자가 남자처럼 차림. 또는 그런 차림새.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언중 중 소수자의 의사를 별로 존중하지 않고 소수자 억압에 관한 의식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립국어원의 정의가 낱말의 '뜻'이라고 불리는 게 제일 싫다. 언어의 정의는 헤게모니 싸움인데, 그 헤게모니 싸움을 피하는 척 강자의 처지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국립국어원의 정의를 빌려온 것은 내가 인식할 수 있는 한계 때문이다. 내가 소수자이기 때문에 비소수자의 이야기를 할 때는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국립국어원의 정의를 빌려와야만 한다. 그래야 소수자 입장에서 그 인식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야기하면 난 저 정의에 따른다고 해도 여장한 적이 없다. 물론 나는 화장하고 다닌다. 블라우스도 입고, 스타킹을 신고 반바지나 치마를 입기도 한다. 화장은 화장대로 내가 하고 싶어서 할 뿐이고 딱히 여성용이라고 표시되어 판매되는 상품도 아니다. 스타킹도 뭐 여성용이라고 나오지도 않는다. 반바지도 마찬가지. 치마나 블라우스는 여성복 분류로 판매되긴 하지만 내 몸에 맞아서 입을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게 여장이라 부르기도 황당한 게 나는 여장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첫째, 나는 여자처럼 차린다는 것이 불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내가 입고 싶다고 생각한 대로 입는다. 여자처럼 차린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처음 입을 때 용기를 내어 입긴 했지만, 타인의 무지한 비난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처음 화장할 때에도 용기를 내긴 했지만, 그건 내 화장의 수준 때문이지 화장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여자처럼'이라는 내 인식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여장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나는 내 젠더를 고민하는 사람 젠더 퀘스처너(Gender Questioner)[각주:1]이다. 젠더퀴어[각주:2] 혹은 논바이너리(Non-Binary)[각주:3] 쪽으로 고민하고 있다. 안드로진[각주:4] 내지 뉴트로이스[각주:5] 혹은 데미메일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100% 남자가 맞는지부터 의문을 품고 있으므로 여장의 전제인 남자가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젠더 고민 끝에 나는 100% 남자라고 결론을 내린다고 해도 첫째에서 말한 여자처럼 차림새를 가꾸는 것 자체에 의문을 가진 이상 여장이 되기 힘들다.

셋째, 반대로 남장을 끌고 와보자. 여자가 남자처럼 차려입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 사회에서 남성만이 입는 옷이 뭐가 있을까? 없다. 또 여자는 반드시 화장해야 하나? 아니다. 화장하지 않는 여자도 있다. 여장의 반의어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지금 무슨 사회적 의미가 있는 단어인가? 단어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남자가 바지를 입고 화장을 하지 않으면 바지를 입고 화장을 하지 않는 여자가 많다고 그에 빗대어 여장했다고 할 것인가?

난 내 생물학적 성별이 XY 염색체의 남성이라 추정[각주:6]하고 있고,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0세기에 태어난 남성을 가리키는 1로 지정 성별은 남성이다. 하지만, 사회에서 성역할을 강제로 부여받아 산다. 난 그 성역할을 강제하는 게 싫다. 내가 어떻게 생겼든 어떻게 살든 나는 성이라는 껍데기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존중받고 싶다. 젠더라는 프레임으로 나를 보게 하고 싶지 않다.

  1. 자기 자신의 젠더에 의문을 품는 사람 [본문으로]
  2. 성정체성 소수자. [본문으로]
  3. 성정체성 소수자로 젠더 이분법(여성과 남성으로만 구분)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 [본문으로]
  4. 남성을 뜻하는 Andro와 여성을 뜻하는 Gyne의 합성으로 양쪽의 정체성을 모두 갖고 있다. 바이젠더가 왔다갔다 하는 것이라면 안드로진은 모두 섞여 있는 상태를 뜻한다. [본문으로]
  5. Neutrois,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에 가깝다. 중성 정도? [본문으로]
  6. 검사한 적 없으니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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