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치마를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두려웠다. 당시에는 내 의도와 상관없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지 몰라서 굉장히 두려웠다. 그중 "너 혹시 여자가 되려고 하느냐?", "변태냐?" 따위의 이야기를 들을까 가장 두려웠다. 나름 성평등을 위한 운동을 겸해서 치마를 입으려고 했던 것인데, 남의 시선이 굉장히 두려웠다. 남의 시선을 무시하기를 좋아하면서 굉장히 두려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볍게 패션으로 시작해보고 싶었다. 예전에 몇몇 연예인이 했던 것처럼 바지 위에 랩스커트를 덧입는 식으로 시작하려고 했다. 다른 치마는 안 된다. 꼭 랩스커트여야만 했다. 전례가 있어서 꼭 랩스커트를 선택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짧으면, 바리스타 앞치마 같을 것 같기도 했고, 돌아다니기도 부담스럽고 그래서 적당히 무릎길이로 덧입고 싶었다.

그러던 중 용기를 얻은 사건이 있었다. 당시 나와 만나던 그가 용기를 줬다. 심지어 그는 내가 치마를 고를 때 함께 골라주기도 했다. 그때 그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던 건지, 그가 함께 골라줘서 행복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행복한 모습을 옷가게 점원에게 보여주었었다. 그일 뿐 아니라, 나중에 내가 굉장히 행복한 얼굴이었다는 이야기를 옷가게 점원에게 듣게 되며 어색함이 많이 사라졌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난 용기를 더 얻고 당당하게 스타킹을 신고 (당시는 겨울이라 안 신을 수는 없었다) 그 위에 치마를 입을 수 있었다.

이후로 데이트할 때 내가 치마를 입는 일도 잦았다.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나를 나로만 봤다. 다른 존재로 보지 않았다. 뭘 입든 그는 내 모습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5월부터 다시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난 치마를 입는 것을 그만두었고, 화장만 하고 다녔다.

생각해보면 화장을 본격적으로 한 것은 치마를 입은 다음이었다. 그 전에는 화장도 제대로 못 했다. 그냥 파운데이션 종류만 펴 바르고, 눈썹이나 조금 그린 정도였다. 그렇게 화장을 하면서 점차 색조 화장의 가짓수도 늘렸다. 나도 모르게 점점 풀메이크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치마 입는 것을 중단하고 화장만 하던 중, 멀리 떨어지게 되며 연인과 헤어졌다. 혼자 지내면서 화장한다고, 핫팬츠 입는다고 학생으로부터 성희롱당하고, 교무부장으로부터는 사직서 이야기에, 교원 모임 때 그 며칠 전 성희롱 예방 연수 내용과 다른 교감의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소리까지. 한동안 머리 아프고 힘든 일투성이였다. 2학기 말에 다른 학교 교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하기까지 하면서 마음이 많이 망가졌다.

시간이 지나 학년이 끝났다. 계약이 끝나고 난 새 직장을 얻지 못했다. 면접 보는 곳마다 머리 길이, 혹은 화장을 언급하며 나를 힘들게 했다. 그렇게 난 백수가 됐고,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난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그러다 여유가 생겼고, 치마를 다시 입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많이 달라졌다. 처음 치마 입을 때와 굉장히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성장하기도 했다. 많은 것을 공부했고, 더 많은 고민을 했다. 난 나를 좀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정체성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내 취향도 열렸다. 난 내가 선호하는 것을 알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지금 역시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지금 정확하게 내가 입기 원하는 스타일의 치마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어울리는지는 이제 뒤가 되었다.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우선이 되었다. 겨우 치마 하나일지 모르지만, 그 치마를 입으면서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취향을 발견하게 되었다.

겨우 한 번에 걸치는 한 조각의 옷, 치마 한 장이지만 나의 자아를 찾게 해주었고, 나의 패션 취향을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 말고 여러 사람의 변화를 끌어낸 것 같다. 그 덕에 난 삶과 사람을 더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난 이전보다 좀 더 행복한 느낌이 든다. 가끔 힘들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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