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장하는 사람이다. 기초화장, 피부를 표현하는 화장 1, 색조화장 2까지 한다. 화장도 별로 예쁘게 나오지도 않고, 튀게 하지도 못하는 초보이다. 그런데 화장한다는 이유로 간혹 싸워야 한다. 나는 지정 성별이 남성이다. 그리고 시스젠더 3이다. 요즘에 조금씩 내 성별을 특정해야 한다는 데 의문을 품긴 하지만 4, 일단은 시스젠더이다. 5
우리 가족은 내가 화장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혐오에 가까운 것 같다. 화장하면 잔소리를 한다. 적당히 하라느니, 얼굴이 너무 하얗게 되었다느니, 애(내게는 조카)가 내 화장 때문에 운다느니 온갖 핑계로 화장하는 것 자체를 갖고 건든다. 그 정도는 좀 참고 지냈다. 그러다 참지 못할 만큼 화나는 일이 생겼다.
아버지 정년퇴임 후에 직원들과 밥 먹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씻고 기초화장품을 바르는데 동생이 내 방문을 갑자기 활짝 열고 이렇게 명령조로 이야기했다.
"형 화장하지 마, 아버지 뭐하는 자리라."
"잔소리, 잔소리."
"화장하지 마."
"잔소리나 하지 마."
화장할 생각도 없었는데 너무 화가 났다. 참고 가자는 마음이 안 들었다. 화장을 진하게 하고 갈까 하다 마음이 너무 상해서 도저히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냥 가지 말자고 생각하고 옷을 다 벗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다 말을 해줘야 시간 낭비 안 할 것 같아서 어머니께 메시지를 보냈다.
'안 갈 테니 그냥 가세요.'
좀 있으니 밖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동생은 화가 난 목소리로 'ㅇㅇㅇ 나와!' 어머니가 울먹이며 말리는 소리.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건 없으니까. 난 내가 기분 상했다는 것을 표현했을 뿐이다. 내 표현으로 저러는 게 이상한 것이다. 난 그래도 참고 기분 상했다는 것을 표현했을 뿐이다.
그냥 갈 줄 알았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내려왔다.
"넌 그냥 넘어가면 안 되냐?"
"애초에 말 안 하면 안 됩니까?"
"말 한 걸 어떡할 거냐?"
"그러니까 감정 상한 건 어떡할 겁니까?"
"어떻게 한 마디를 안 지냐? 아버지 중심 자리인데 아버지 때문에라도 화장 안 하면 안 되나?"
"내가 장식품입니까?"
"무슨 말이냐?"
"내가 액세서리, 장식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말할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체면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까?"
"체면 좀 생각해주면 안 되냐?"
"그게 나를 사람 취급 안 하는 거 아닙니까?"
"넌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냐?"
"내가 이기적인 겁니까? 사람을 사람 취급 안 하는 게 누군데!"
"어떻게 넌 너만 생각하냐?"
"뭐가 나만 생각하는 겁니까?"
"너가 그렇게 화장 못 하게 한다고 안 간다고 하는 게 너만 생각하는 거지."
"그러면 애초에 자기네만 생각해서 그런 말 안 거 아닙니까?"
"나는 말을 잘 못 해서 뭐라고 못 하겠다."
"내가 말을 잘하는 겁니까? 애초에 잘못된 게 누군데 그럽니까?"
결국, 포기하고 갔다. 난 속만 부글부글 끓여대다 잠들면서 간신히 가라앉혔다.
'머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혼선언 - 나는 존엄하다. (0) | 2017.03.17 |
---|---|
나는 장식품이 아니라 인간이니 화장을 하겠다. - 2 (0) | 2017.03.16 |
나는 장식품이 아니라 인간이니 화장을 하겠다. - 1 (0) | 2017.03.15 |
마지막 용사 (0) | 2015.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