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유니클로 <'감탄' 팬츠> 광고 시리즈는 재미를 추구한다. 남자들의 바지가 불편하다면서 이 바지를 입으면 '감탄'할 만큼 편하다고 광고한다. 광고를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많다. 단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편안하다는 치마, 이 이야기가 조금 불편하다. 왜냐하면, 치마 입는 과정은 불편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커피를 들고 스커트를 입은 채 걸어간다. 여자들의 스커트를

남성이 여성들을 바라보는 듯한 모숩이다. 그들의 편안함을

여자들이 커피를 들고  걸어간다. 언제까지 부러워만 할 것인가


"여자들의 스커트를, 그들의 편안함을, 언제까지 부러워만 할 것인가."는 불편한 말이다.


먼저 치마를 입을 때 신경 쓸 것이 많다. 속옷이 보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짧은 치마의 경우 H라인으로 팽팽하면 움직임도 불편하고 앉았을 때 틈으로 속옷이 보일까 봐, 허리를 숙일 때 뒤로 엉덩이와 속옷이 보일까 봐 신경 쓰인다. A라인의 경우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짧으면 신경 쓰인다. 펜슬 스커트 같은 경우에는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좁아지므로 다리의 움직임이 제한된다. 무릎까지 오는 치마도 H라인의 경우 다리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많이 불편해진다. 물론 이런 치마들이 바지에 비하면 통풍은 잘 된다는 장점이 있다.

긴 치마의 경우는 나풀거리면 나풀거리는 대로 다리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팽팽하면 팽팽한 대로 다리의 움직임을 많이 방해한다. 상대적으로 함기량이 많으므로 보온이 잘 되긴 하지만, 바지에 비하면 치마는 기본적으로 활동이 불편하다.

활동이 불편한 것만이 아니다. 과정이 추가된다. 치마를 입는 과정은 치마의 종류나 계절 등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 스타킹을 신고 치마를 입는다. 스타킹은 통풍이 안 된다. 더군다나 치마를 입으며 스타킹을 신을 때 무릎보다 조금 위로 올라오는 스타킹보다 엉덩이까지 감싸는 팬티스타킹을 많이 신기 때문에 전체적인 압박감도 압박감이지만 통풍 안 되는 부분이 넓다. 특히 다른 데는 몰라도 발에 통풍이 안 되기 때문에 답답하다.

스타킹을 안 신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치마를 입을 때 스타킹을 안 신을 수 있는 계절이 얼마나 있을까? 거의 없다. 치마를 입으려면 스타킹은 거의 필수이다. 보온에도 필요하고 맨살끼리 부딪치며 마찰하는 것도 예방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라면 치마를 입을 때 검은 스타킹을 강제로 신어야 하는 시기도 있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물론 스타킹을 신으면 압박되어 각선미 보정 효과 등이 있다. 하지만 털이 있으면, 털이 보이면 보기 흉하다는 이유로 제모한다. 여성에게 제모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제모를 많이 한다. 여성에게 다리털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 털이 가늘거나 별로 없는 여성들 정도나 여성들에게 털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한 후배는 동생 자취하는 집에 놀러 갔다가 면도기를 발견했다. 면도기를 보고 흥분해서 남자랑 동거하나 싶어 동생을 불러 야단을 치려고 면도기에 관하여 캐물었다. 동생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본인 제모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둘 다 여성이다. 언니는 털이 거의 나지 않아 미용을 위한 제모가 필요 없었고 동생은 본인의 미용을 위한 제모가 필요했다.

여하튼 그런 편견과 사회적 강요 때문인지 몰라도 올리브영이나 왓슨스 같은 데 가면 제모 관련 용품들이 전시된 코너가 있다. 제모 크림, 제모 왁스, 제모 왁스 스트립, 여성용 면도기 등 다양한 용품들이 있다. 이런 게 왜 있을까? 제모 왁스 스트립을 보면 팔 및 다리용, 비키니 및 겨드랑이용, 얼굴용 등 여러 부분이 있다. 팔, 다리, 비키니 라인, 겨드랑이, 얼굴 등 미용을 위한 제모 수요가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이다. 

제모 크림은 크림을 바르고 10분 남짓 있으면 털이 불어난다. 파마약 같은 냄새도 나고 예민할 경우 피부가 따가울 수도 있다. 민감한 부분이나 상처에 바를 경우 한동안 쓰릴 수도 있다. 털이 불어나면 스패츌러로 밀어서 털을 뜯어낸다.

제모 크림


제모 왁스의 경우는 전자레인지로 녹이거나 물로 중탕해 녹여서 스패츌러로 바른 다음 스트립을 붙인 다음 한 번에 당겨서 수많은 털을 뽑아낸다. 제모 왁스 스트립의 경우 이게 스트립에 발라져 있어 손으로 비벼 뗀 다음 제모할 부분에 붙이고 한 번에 당겨 털을 뽑아낸다. 피부에 남은 왁스는 오일 시트나 오일로 닦아내거나 미온수로 녹여 씻어낸다. 좀 고통스러운 방식이지만, 털을 족집게로 일일이 뽑아내는 것보다 고통이 덜하게 느껴진다.

제모 왁스

제모 왁스 스트립

면도기의 경우 면도크림을 바르거나 해서 남자들처럼 면도한다. 면도해서 털이 겉에 드러나지 않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여성용 제모 면도기

살펴보면 털이 적으면 스타킹 착용 후 치마 입기 2단계이다. 털이 많으면 제모 후 스타킹 착용 후 치마 입기 3단계이다. 이래도 치마가 편해 보이는가?

분명 넷플릭스 광고 유세윤, 에뛰드 광고 전현무보다야 타깃 설정이 잘 된 광고이긴 하다. 하지만, 치마를 입지도 않는 이들에게 치마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 타깃 설정이 올바르다고 해도 성편견을 조장하는 광고는 바르지 않다.

학교에서는 교과서가 있는 교과만 갖고 수업하지 않는다. 교과 외에도 여러 가지 분야에 관하여 자율 시간 등을 통해 교육한다. 자율 시간을 통해 성폭력 예방, 폭력 예방, 다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를 교육한다. 이런 교육은 특별하게 자율 시간만 갖고 수업하지 않는다. 일반 교과 시간에 녹여내어 수업하기도 한다.

나는 그 중 성교육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그러다 보니 보건 선생님께 찾아가서 가끔 그런 내용을 갖고 이야기를 해본다. 대화 중에 보건 선생님이 성교육을 보건에서 가져온 것을 후회한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업무만 늘어난 것뿐이면 괜찮은데, 성교육은 보건에서 전담으로 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다는 것이었다. '섹슈얼리티나 생물학적, 성병 예방을 넘어서 젠더 교육까지 함께 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보건만이 맡기에는 역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성교육은 '모든 교과에서 다 함께해야 한다.'고 덧붙이셨다.

성교육에서 젠더가 빠진 상태는 아니다. 성교육 관련하여 보고할 때 몇몇 교과를 지정하여 그 교과에서 성교육했는지 보고 한다. 내 기억으로는 그 교과가 기술가정, 도덕, 사회, 과학, 체육이다. 그 외의 교과는 할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인지 보고받지 않는다.

성교육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국가는 성교육 표준안을 만들어내어 일선 학교에 배포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비웃음을 받을 만큼 질이 낮은 편이다. 실제 성교육을 그 표준안대로 집행하는 것이 문제없다고 하더라도 성교육은 은연중에 굉장히 다양한 곳에서 일어난다. 학교폭력예방 교육에서도, 일선 교과에서도,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금융교육에서도 나타난다.

남학생반 금융교육을 하는 데 우연히 들어간 적이 있다. 가서 사진이나 좀 찍어 줄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기회비용과 한정된 자원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강사분이 쉽게 설명하려고 했는지 예시를 하나 들었다.

"여자친구 있는 분 있어요?"

별 대답이 없다. 예상했는지 바로 이어 이야기를 했다.

"예쁜 여자는 한정되어 있죠?"

너무 당황스러웠다. 예쁜 여성이라는 말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여 자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시스젠더, 이성애 중심으로 학생들의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고정하면서 인간을 대상화했다. 영웅호색이나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는 남성 중심의 폭력적 언사와 다를 바 없는 말이 교육 중에 나온 것이었다.

교육이 끝나고 문제를 제기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인식을 고쳤다고 해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다른 사람이 외부에서 올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의 젠더 인식이 괜찮다면 괜찮을까? 아니다. 학교 자체, 그 안에서도 성적 대상화는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성교육, 성폭력 예방교육에서도, 교칙 위반을 단속한다는 용의복장 단속에서도 계속 성적 대상화한다.


- 2년 전 모 학교에서 한 성폭력 예방교육

"지금부터 성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하겠습니다. 여학생들! 짧게 입지 말고, 옷 제대로 입어라. 밤에 돌아다니지마. 남학생들! 니들이 참아! 니들만 참으면 돼."

방법도 황당하지만, 내용도 황당한 성폭력 예방교육이다. 요즘 이렇게 하는 학교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학생의 복장에 따라 성폭력 가능성이 달라진다는 가해자 중심 사고방식은 성폭력 예방에 도움되지 않는다. 피해자의 자존감을 낮추고 후에 피해를 입었을 때 자책감을 느끼게 할 뿐이다.

그리고 이건 교육이 아니다. 복장을 핑계 삼아 일방적인 언어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고, 남학생들이 여학생을 성적 대상화 하도록 부추기는 것에 불과하다. 더불어 참으면 된다는 말로 성욕을 성폭력의 원인 삼아 성폭력이 어떤 관계에서 일어나는지 생각 못 하게 만든다. 차별적 말로 성 편견을 부추기는 것이다.


- 작년에 모 학교에서 한 성폭력예방교육

자율시간을 통해 성폭력예방교육 영상을 상영했다. 보면서 좀 당황스러웠다. 젠더 감수성을 키우기보다 이전에 봤던 성교육보다 조금 나아진 정도였다. 시작 부분에서 남성은 사정과 쾌락을 이야기하지만, 여성은 월경과 임신을 이야기하며 차이를 비교한다. 월경은 고통, 사정은 쾌락이라는 방식으로 여성의 쾌락을 배제한다. 남성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고 하지만, 여성에게는 월경으로 겪는 통증만 언급하고 성적 쾌락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성의 성적 쾌락을 감춘다.

성욕은 개인차라고 하며, 사정을 통해 남성은 성욕이 발달하지만, 여성은 초경과 비교하며 성욕의 발달이 상대적으로 늦는다고 비교한다. 자연스럽게 마찰을 통해 알게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가정을 하지도 않는다. 여성은 초경 시기보다 성 경험이 늦기 때문에 성욕의 발달이 늦어진다는 정도로 넘어간다.

긍정적이게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언급하기는 한다. '사회적 관행이나 타인의 압력에 구속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나 판단에 의해 자율성 있고 책임성 있게 자신의 성적인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라고 언급한다. 언급하며 '아니야'는 내숭이 아닌 의사 표현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성적인 부분에 관하여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는데 여성은 임신의 책임 따위로 성적 쾌락은 배제당한다. 더불어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공개적 연애라는 말로 반쯤 부정한다.

성폭력에 노출되었을 때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을 언급하지만, 성폭력을 보고 가만히 있지 말라는 말이나 성폭력에 반대하는 연대 행위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더불어 성폭력의 원인도 언급하지 않으며 여성이 성폭력의 대상이라고 성적 대상화만 한다. 남성 간의 성폭력에 관한 언급은 하지도 않는다.

보는 내내 황당해서 보건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올 줄 알았다고 하셨다. 할 수 있는 게 한 시간밖에 없는데, 한 시간에 하기에 이것보다 나은 내용을 가진 것도 잘 없다고 하셨다. 원래는 각 교과에서 다양하게 접하며 해야 하는 것이 성교육인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서 안타깝다고 하셨다.

그나마 나은 성폭력예방교육 영상도 성적 대상화 자체를 피하지 못한다.


복장 단속이나 화장 단속은 성적 대상화 그 자체이다. '학교는 보수적이다. 학생답지 못하다.'는 핑계가 대부분이지만, 그 자체가 성적 대상화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개인의 권리, 존엄을 생각하지 않고 여학생이기에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 그 자체가 성적 대상화이다.

청순한 아름다움, 화장기 없는 아름다움, 청초함 이런 것도 성적 매력 중 하나이다. 사람을 그 자체로 존중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성적 대상화이다.

대학생 때 학생회에 있었다. 일을 잘하지는 못해서 그때 학우들께는 죄송스러운 마음이 크다. 여하튼 학생회를 겪은 덕에 학생회에 관심이 많다. 특히 학생회의 자치와 자주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학생회를 보면 항상 안타깝다. 대부분 교칙에 어긋나는 것 따위나 단속하는 선도부 역할밖에 못 하는 모습 때문이다. 어른들이 못 하게 막는 탓이 가장 큰 것 같다. 그래도 매해 공약으로 어떻게 학생들의 욕구를 충족시킬까 기대하며 11월에 하는 학생회 선거를 유심히 살펴본다.

2016년에 겪은 학생회 선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약은 살색[각주:1](살구색, 베이지색) 스타킹 허용이다. 그 중 '허용'이라는 단어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치마 교복을 입는 학생들이 보온을 위해 신는 스타킹인데, 그게 검은색이 아닌 살색이라는 이유로 '불허'하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맨다리나 검은색 스타킹은 되는데!

그 공약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학교에서는 살색 스타킹을 신는 곳이 많았다. 내가 순회 가는 학교는 살색 스타킹을 신는 학생들도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도 그 공약을 보고 다른 학교에서는 신는데 왜 못 신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말이 오갔다. 한 선생님이 너무 궁금해서 학생들 복장 규정과 가장 밀접한 학생부에 물어보았다.

"살색 스타킹을 왜 못 신게 하는 거? 이해를 못 하겠는데? 추우면 신을 수 있는 거 아니? 검은색만 신어야 돼?"

학생부의 계원인 선생님이 답했다.

"중부지역 학생부 협의회(대충 이렇게 기억한다.)에서 살색 스타킹을 신고 다리 벌려서 앉는 여학생들 때문에 남선생님들이 곤란해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심지어 속바지도 안 입어버려서 난감해서 살색 스타킹을 허용하지 않기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난 여기까지 듣고 교무실 밖으로 나와버렸다. 수업 준비하러 가야 할 시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짜증이 났다. 권리에 앞서는 통제 중심주의, 그것도 성폭력 예방은 가해자가 해야 하는 것인데 그 예방을 피해자인 여성이 해야 한다는 투라 짜증이 났다. 이미 여성인 선생님께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어서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른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복 입을 때 맨다리에 속바지 안 입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다리 벌리는 경우가 많다. 속옷이 보일 것 같으면 안 보면 되는 일 아닌가? 아니면 책상 앞을 가리면 되는 것이다. 별로 어려운 일 아니다. 아니면 치마 교복을 없애고 바지 교복만 입게 하면 된다. 그건 그저 교사 중심으로 학생을 통제하는 것일 따름이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다리 벌렸을 때 검은 스타킹을 신은 상태거나 속바지를 입은 경우에는 치마 속 보는 것이 안 민망하다는 이야기이다. 치마 속이 보이면 그 속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에 관한 반성은 애초에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네가 왜 안 가렸느냐며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성폭력이 발생하면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1. 살구색이 인권적인 관점에서 맞는 표현이지만, 공약에서 표현이나 실제 겪었던 표현 떄문에 살색으로 썼다. [본문으로]

근무하던 학교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다. 이번 임용시험에서 떨어져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근무지를 알아봐야 했다. 공부만 하기에는 내 개인의 경제적 사정도 문제고, 마음 붙여 일할 데가 없으면 마음이 힘들다는 것도 문제라서 그렇다. 몇 군데 면접을 치렀는데 모두 떨어졌다. 망할, 어쩌면 올해는 직장 없는 교사로 살게 될지 모른다.

직장이 없어 소득도 소속도 없을 것으로 생각하니 별로 마음이 좋지 않다. 결과라도 좋았으면 마음이 덜 힘들었을 텐데, 과정도 별로 좋지 않았다. 면접을 돌이켜 봤을 때 굉장히 불쾌한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에 한 번은 소신에 따라 바로 반발했고, 한 번은 굽히고 성실하게 소신에 따라 답했다. 둘 다 반발했어야 했다. 내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었는지, 가중치를 다르게 둔 것이었는지 하나만 반발했다.

그 질문은 성차별적, 반 인권적인 질문이었다. 그것도 내 외모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 중 하나는 화장에 관한 질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머리 길이에 관한 질문이었다. 각기 다른 성의 학생들의 학생들과 비교해서 질문했다. 질문 자체에 학교의 이중성, 성차별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 2월 21일 면접

이날 면접에서 들은 질문은 이렇다.

"선생님은 남자 선생님인데 화장을 좀 하셨네요. 그것 관련해서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 우리 학교는 학생들 화장 엄격하게 단속하는데 학생들이 선생님을 보고 '선생님은 화장하는데 우리는 왜 안 돼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난 화장을 한다. 꾸미는 것이 좋다. 화장이 재미있다. 단지 재미만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성편견을 깨기 위한 내 나름의 운동으로써 하는 행동이다. 여성이 꾸미는 것은 당연하고 남성이 꾸미는 것은 이상하다는 것에 저항하고 사람들이 차차 익숙해지게 만들어 세상을 바꾸기 위한 행동이다. 언젠가는 화장이 개인의 선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는 것이다.

저 물음은 내 운동의 목적이나 목표를 모른 채 한 질문이다. 물론 내 운동의 존재 여부조차 모를 것이다. 심지어 저 날은 바빠서 색조 화장도 못 한 날이었다. 파운데이션에 눈썹 정도만 그린 날이었다. 그래서 화장을 제대로 했다는 생각도 못 했는데, 화장했다는 것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니 당황스러웠다.

황당하기도 했다. 질문한 면접관 본인도 화장한 상태였다. 학생들은 여교사의 화장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고, 남교사의 화장만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인가? 성차별적 질문이었다. 그래서 바로 반발했다.

"그런 성차별적 인식을 갖고 이야기하시다니요. 그러면 여자 선생님들 먼저 화장을 못 하게 하고 이야기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에 그 면접관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무엇인가를 적었다.

"학생과 교사는 다르다고 한다."

내가 한 말이 아닌 말을 중얼거리며 적었다. 너무 황당했다. 그렇게 면접을 마치고 나왔다. 계속 곱씹어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성차별이었다. 거기다 학생에 대한 모순적인 태도가 동시에 들어가 있었다.

성차별적인 태도는 이렇다. '남성의 화장은 당연하지 않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남교사에게 자신들의 화장을 단속하는 것과 비교하며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니 그것에 관한 것을 물어보아야 하겠다.'며 특정 성의 화장만 문제 제기하는 것은 한 성은 당연히 화장해야 하는 존재, 한 성은 절대 화장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낙인 찍는 것이다.

학생에 대한 모순적인 태도는 이렇다. '학생들의 용의복장을 통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학생 통제를 당연하게 여긴다. 동시에 학생의 반발을 걱정한다. 통제하지 않으면 통제에 대한 반발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통제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모순이다.


- 2월 24일 면접

이날 면접에서 들은 질문은 이렇다.

"지금 머리를 묶으셨는데, 우리 학교는 남학교이다 보니 두발 규정이 엄격합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의 머리를 보고 '선생님은 머리 기르는데 우리는 왜 머리 기르면 안 돼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난 머리를 기른다. 큰 의미는 없다. 심한 곱슬머리이라 짧은 것보다 긴 것이 머리 정리하기 편하다. 추울 때 머리 풀면 따뜻하고 더울 때 머리 묶으면 시원하니 좋다. 내 머리의 곱슬거림은 예쁘다. 컬이 예뻐서 어디서 파마한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머리를 짧게 정리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 그냥 그럴 생각이 들면 그때 자를 생각이다. 길이가 어느 정도 이상 되면 머리카락 기부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저 물음은 생각도 못 해 봤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올해 마지막 면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반발을 못 했다. 소신에 따라 성실하게 답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기르다가 이왕 기른 김에 몇 달 정도 더 기르고 머리카락 기부를 해볼 생각으로 더 기르고 있다. 왜 기르면 안 되냐는 물음에는 답을 못하겠다. 교칙으로 규제하고 있는데, 나는 그 교칙으로 규제하는 대상에 해당하지 않거든.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바꿔보는 것은 어떻겠니? 규정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바꿔보겠다면 응원할게.’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 성차별적 인식을 갖고 질문을 해도 되는 겁니까? 여교사에게는 하지 않을 질문을 왜 머리가 긴 남교사에게 하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머리 길이는 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까?”

질문 자체가 성차별이다. 이 질문에는 앞의 면접과 같이 학생에 대한 모순적인 태도가 동시에 들어가 있다.


애초에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이해하기 너무 힘들다. 이제까지 겪은 교직 생활을 돌이켜 보면 이 교직 사회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건 성차별이고 폭력이다. 겪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학교에서 겪은 다른 성희롱, 성차별들이 생각난다.

낙태권이라는 말 참 생소하다. 정말 생소하다. 설명을 읽거나 들을 수록 슬퍼지는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중고등학교 시절 성교육부터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난 낙태에 반대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성교육을 받을 때 들었던 낙태와 관련한 이야기는 생명 존중 밖에 없었다. "태아의 생명에 관한 윤리적 문제", "이후 임신이 어려워 질 수 있다" 같은 이야기가 거의 전부였다. 낙태와 관련한 영상을 봤던 것 같은데, 그 영상에서 낙태는 그만큼 끔찍했다. 이후 성별 감별 후 여아만 낙태하는 문제에 관한 시사 프로그램을 봤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난 낙태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했다. 성차별과 책임지지 않는 행위라는 이유를 댔다.

성교육과정에서 피임 이야기를 아예 듣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응급 피임약 이야기 정도 들었다. 그때는 무책임한 남자들이 문제라는 이야기 밖에 못 들으며, "원하지 않는 임신 방지 목적"의 어쩔 수 없는 피임 방법으로 밖에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낙태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었고, 들어야 할 생각도 못했다.

이제는 다르게 생각한다. 낙태에 찬성한다. 개인의 존엄성을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성별 감별 낙태와 낙태죄 두 가지 문제의 본질은 같다. 방향이 조금 다를 뿐, 모두 개인, 특히 임신한 여성의 신체를 도구로 바라본다는 것은 같다. 전자는 남아선호라고 하는 여아혐오와 동급의 성차별적 사회에서 남아를 낳아야 할 도구로 만들어버린 것이고, 후자는 사회의 인구를 강제로 조정하려는 인간 생산의 도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 방향의 차이는 단 하나다 선별 생산이라는 제한이냐, 생산 중단 불가라는 제한이냐. 둘 모두 여성을 생산의 도구로 바라보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되어 있다. 낙태죄라는 데서 이미 여성을 도구로 바라보다 보장해야 할 인간의 존엄성을 깨트리는 행위가 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을 근거로 하면 낙태죄는 성별 때문에 차별을 받는 것이다. 임신할 수 없는 신체를 가진 이를 제외하고 임신 가능한 신체를 가진 이만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추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헌법 36조 1항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2항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3항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을 보았을 때에도 국가의 보장이 우선이다. 개인의 권리에 대하여 국가의 의무를 먼저 강조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37조 1항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2항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임신과 관련된 내용이 나와있지 않다는 여성을 생산의 도구로 보며 여성의 신체의 자유와 권리를 경시해서도 안 된다. 또한 임신이 국가안전보장이나 질서유지, 공공복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여전히 낙태권이라는 말은 생소하다. 자기신체의 권리에 다른 말을 더 붙여야 한다는 것이 슬프다. 어떤 이들은 "책임질 수 없는 행위"라는 말을 통해 임신을 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진 이의 책임만 강조한다. 정작 국가에서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책임은 어디에 두고 그런 법을 입법하려는 것일까? "책임질 수 없는 행위"는 힘 없는 개인에게 굴레를 씌우기 위한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힘을 가진 집단이나 개인의 무책임을 막기 위한 말로만 쓰여야 한다.

- 우연히 내 진짜 욕망을 깨달았다.

치마를 입고 다닌 지 4개월이 넘었다. 나는 내가 그저 치마를 입고 싶어서 입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내 마음 깊은 곳에 권력욕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가족의 장남이며, 우리 집안의 장손인 내가 가부장제를 싫어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단지 장손인 내게 없는 그 빼앗긴 권력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고 화장까지 하는 것이었다.

평소 유입 로그를 살펴보며 검색어를 그대로 넣어 검색해보는 습관이 없었더라면 몰랐을 뻔했다. 오늘 그 검색어 살펴보기 덕에 훌륭한(!) 글[각주:1]을 두 개나 읽게 되었다. 『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를 먼저 보았고, 그 글의 링크를 통해 『구조론 심리학3. 남자들이여, 치마를 입어라! -오세(http://gujoron.com/xe/277606)』라는 글도 접하게 되었다.

앞쪽 링크의 글머리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남녀평등이 점점 구현되고 있는 지구촌에 아직도 남성들에게는 불문율 처럼 금기시되는 사항이 있으니… 바로 치마입기다. 여성들은 이미 남자옷을 다 입고다녀도 괜찮은 세상인데 남자들은 치마를 못입는다. 집안에서 쫓겨나고, 거리에서는 눈총의 대상이 되고…”[각주:2]

그리고 마지막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여하튼 극한도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21세기에도 이러한 터부가 남아있는데 고대시대에는 얼마나 큰 터부로 인하여 인간들이 고통을 겪고 살았을지… 남성들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여성들에게 빼앗긴 권리를 찾을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남자들도 부디 유선형 본능을 되찾을 수 있기를…”[각주:3]

난 이렇게 깨달았다. 내 행동은 여성에게 빼앗긴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이었다.


- 권력자 남성의 특징

그런데 난 집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안 쫓아내시던데? 거리에서는 그다지 눈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 자기 할 일에 바빠 나 같은 존재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난 이미 권력을 가졌나? 으하하하하 우리 가족 최고 권력자가 나라니, 황당해서 웃음 밖에 안 나온다.

글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여성의 옷은 사회에서 상위 계층이 입을 수 있는 옷의 형태이고, 여성의 머리 또한 상위계층이 누릴 수 있는 형태로 보인다.”[각주:4]


“물론 남성들도 머리를 기르던 조선시대까지는, 상투를 틀거나 등등 작게 만드는 기술을 사용하였으나, 일제시대 단발령이 내려지고 엄청난 남성들의 반발이 있었다. 즉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가 그만큼 낮아진다는 것에 반발했던것…”[각주:5]


“권력자 남성 복장의 치마형태는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통털어서 전부다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치마나 긴머리나 모두 우아한 곡선으로 되어있다. 여성의 눈화장도 마찬가지, 마치 유선형의 날씬한 물고기를 보는듯하게 눈화장을 하면, 그것이 사람의 시선을 끈다.”[각주:6]


“치마나 긴머리와 마찬가지로, 화장 또한 고대시대에는 신분의 상징이였을 것이다. 신분이 높은자가 좋은 화장을 하여, 남들이 보기에 낮은 계층과 구분이 된다. 현대사회에서도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남자또한 화장을 하고 출연을 하는것을 보면 이런 추론이 크게 틀린것은 아닐듯 하다.”[각주:7]

난 권력을 가진 자의 상징으로 머리도 기른 것이고, 치마도 입고, 대충이나마 화장을 하는 것이었다! 난 권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 권력도 별 권력이 다 있다.

황당할 뿐이다. 권력도 별 권력이 다 있다. 어떻게 머리 기르기, 치마 입기, 화장하기가 권력이 될 수 있을까?

조선 시대의 머리 기르기는 유교의 영향이 강했다. 효경에 나오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불감훼상효지시야(不敢毁傷孝之始也)를 보자.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몸뚱이 터럭, 살갗으로 사람의 몸 전체를 이야기한다. 이런 몸뚱이를 수지부모(受之父母), 즉 어버이로부터 물려받았다. 불감훼상(不敢毀傷), 감히 상처입히지 않는 것이, 효지시야(孝之始也), 효의 시작이라는 내용이다.

머리 기르기가 권력? 분명, 권력과 아무 관계 없다고는 못 한다. 머리 기르기보다 유교의 가르침이 권력이었다.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며 수백 년을 그게 당연한 듯 살아왔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부정당하니 기분이 어떻겠는가? 나라가 만들어내고 자신도 만들어낸 그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일 것이다. 부모에게 효를 다 해야 하는 세계관이 외부에 의해서 무너지니 한 반발이었지, 머리가 길다고 권력은 아니었다. 머리가 길다고 권력이면 상투를 왜 틀까?

치마 입기가 권력이라는 것은 뒷쪽 링크가 더 가관이다.

“바지는 보통의 남성들이 취하는 삶의 양식을 집약하고 있다. 남성은 기본적으로 잉여다. 김동렬님 말대로 유전적으로 보면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여자의 세력이며 잉여이다. 공동체의 세력을 확장하고 영토를 넓히기 위해 남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차피 단 한 명만 있어도 무방한 잉여이기 때문에  공동체에 의해 마구 소모된다. 주로 전쟁의 형태로 말이다.”[각주:8]

“그들은 마구 소모되니까 옷도 아무렇게 입는다.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데 적합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남성의 옷은 거의 기능 위주이고 실용성이 기준이 된다. 남성 옷은 그야말로 '위하여'의 집합체이다. 멋에 의하여, 아름다움에 의하여. 어울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농사짓기 위해, 사냥하기 위해, 전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각주:9]

소모되기 위해 실용적인 바지를 입혔다고 한다. 바지보다 더 먼저 등장한 실용적 복장은 짧은 치마다. 바지보다 만들기 쉽고 동작의 제한이 적다. 바지는 실용적이지만, 바지 제작과정은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가장 기본적인 패턴과 꿰맬 부분만 보아도 바지가 훨씬 번거롭다. 문화권과 별개로 기술적인 면에서 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권력에 더 가깝다. 말을 타지 않는 이상 실용성은 짧은 치마가 훨씬 높다.

또한, 짧은 치마가 패션 일부가 된 것은 불과 백 년도 안 된 20세기의 일이다. 그 전까지 여성은 동작의 제한이 있는 긴 치마만 입어야 했으며, 그 긴 치마를 입고 가사 노동을 해야만 했다. 전쟁 때 생산 노동자가 부족해지자 여성을 고용했지만, 그것도 대체로 바지보다 치마를 입어야 했고, 바지가 여성의 패션이 된 것은 더 이후의 일이다.

앞쪽 링크로 다시 돌아가 유선형을 권력이라고 끌어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치마나 긴머리나 모두 우아한 곡선으로 되어 있다. 여성의 눈화장도 마찬가지, 마치 유선형의 날씬한 물고기를 보는듯하게 눈화장을 하면, 그것이 사람의 시선을 끈다.”[각주:10]

그 전에 왜 남성은 화장을 안 해도 별말을 듣지 않는지, 왜 현대에도 여성보다 남성들이 덜 꾸미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온갖 미디어를 통해 강요받는다. 여성성과 아름다움이라는 말로 강요받는다. 물론 본인의 선택과 미적 감각 때문에 자신을 꾸미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출근길에 화장하는 여성들은 본인을 위해 꾸미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 꾸미는 것일까? 그 꾸미는 행위가 권력이라면 왜 남성들은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꾸미지 않는 것일까?

앞쪽 링크에서 방송을 예로 들기도 한다. 방송 출연을 위해 화장한다? 정확하게는 분장이다. 극에 등장하는 인물의 특성에 맞게 만들기도 하고, 방송에서 카메라가 비출 때 그 사람의 모습을 뚜렷하게 잡기 위해서 꾸미는 것이다. 방송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 분장이다. 방송에 출연한다고 무슨 권력이 생기는가? 방송을 봐도 돈 더 많이 받는 남성이 분장을 좀 더 적게 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 여성혐오

두 링크는 여성혐오이다. 여성혐오는 한문 글자 하나 만들듯이 해석해야 한다. 혐오라는 개인의 감정을 끌고 오면 끝이 없어진다. 사전에서 보통 “여성에 대한 혐오”라고 정의하는 데, 그 사전의 편찬자가 내린 정의일 뿐 정확한 뜻이 아니다. 학자들이나 정치권에서 사회문화, 범죄 등을 통해 여러 가지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현상을 논의하며 계속 새롭게 정의한다.[각주:11]

단순하게 “나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야기는 여성혐오라는 현상과는 그렇게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혐오감뿐 아니라 성차별, 여성에 대한 부정,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행위, 여성에 대한 편견 등을 모두 포괄하며 남성, 여성 모두에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두 링크는 여성에게 강요했던 여성성을 왜곡하여 설명하고 있다. 머리는 기를 것을 강요받았고, 바지는 못 입게 했으며, 화장은 사회적으로 여성에게만 강요했다. 그것을 특권이라고 하며, 남성이 권리를 빼앗겼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여성혐오일 뿐이다.

졸지에 허울뿐인 권력자가 되었다.


  1. 퍽이나! [본문으로]
  2.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3.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4.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5.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6.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7.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8. <a href="http://gujoron.com/xe/277606" target="_blank" class="tx-link">『구조론 심리학3. 남자들이여, 치마를 입어라! -오세』</a> 중에 [본문으로]
  9. <a href="http://gujoron.com/xe/277606" target="_blank" class="tx-link">『구조론 심리학3. 남자들이여, 치마를 입어라! -오세』</a> 중에 [본문으로]
  10. <a href="http://blog.naver.com/handzfree/220674595980" target="_blank" class="tx-link">『남자가 치마입기?(부제: 유선형은 권력이다.)』</a> 참조 [본문으로]
  11. <a href="https://ko.wikipedia.org/wiki/여성혐오" target="_blank" class="tx-link">위키백과 여성혐오</a> 참조 [본문으로]

음악사를 공부하다 보면 20세기까지 유명한 음악가들은 거의 남성이다. 특히 음악 교과서의 음악가는 클라라 슈만 정도가 로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와 함께 로맨스 정도로 언급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굳이 교과서가 아니라도 클라라 슈만은 남편 로베르트 슈만과 평생 자신만을 짝사랑한 브람스와의 관계 정도만 이야기될 뿐이다. 왜 여성은 음악사에서 언급되는 일이 거의 없는 것일까?


- "여성"음악가에 대한 말

계몽시대 자연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Jaques Rousseau)는 “여성들은 예술적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무엇이든지 깨닫고 배우는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각주:1]고 했으며,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역시 부정적으로 보고 “여성 전체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을 지닌 여자일지라도 예술 분야에서 참으로 위대하고 순수하고 독창적인 업적은 단 한 가지도 이룩하지 못하였다.”[각주:2]라고 했다.

이 두 유명 철학자의 말대로 여성은 타고나지 못한 것일까? 20세기의 심리학자인 칼 시쇼어(Carl E. Seashore)는 『왜 위대한 여성 작곡가는 없는가(Why No Great Women Composers?)』라는 에세이를 통해 ‘위대한 작곡가의 조건으로 음악적 기질, 타고난 재능 등의 몇 가지를 제시하였다. 그는 창의성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창조적 능력은 유전보다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각주:3]

지금 음악가들의 성비뿐 아니라 대학 음악과(음악교육과 등 관련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학과를 포함한)의 성비를 생각해 보면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경험에 의하면 남학생들이 존재한다는 생각도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시쇼어가 언급한 위대한 여성 작곡가 존재 여부를 따지기 전에 음악전공자의 수 먼저 살펴보면,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는 여성의 수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위대한 여성 작곡가라고 알려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환경의 영향이라면 후천적이라는 이야기인데, 어떤 후천적 영향이 있던 것일까? 능력과 관련한 후천적 영향은 학습과 교육 정도로 볼 수 있을 텐데, 19세기, 아니 가깝게 20세기만 살펴보아도 대졸자 비율은 남성이 훨씬 높다지만, 현재는 여성의 비율이 더 높고, 음악과는 압도적일 정도다.

이제부터 위대한 여성 음악가의 비율이 늘까? 글쎄 난 부정적이다. 능력 때문이 아니다. 아직 사회적 환경은 그렇게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직 가부장제는 공고하다.


- 가부장제와 "여성"음악가

서양음악사에서 “여성”음악가의 존재가 드러나기 힘들었던 것은 가부장제의 탓이 크다. 가부장제는 집안의 남성 연장자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주는 가족제도이다. 가부장제 아래 가족에서 가장 큰 권력자는 가장이라는 이름의 아버지와 장남이다. 가부장제에서는 이들이 가정 안에서 존중받는 모습을 외부에 보이는 것과 외부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가부장제는 대가족이 아닌 핵가족과 유사한 형태에서도 계속 유지되었다. 장남 유고 시 차남 혹은 그 아래 남성의 존재는 가부장제에서 중요한 존재였다. 집안의 명예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집안의 명예에서 남성보다 뛰어나거나 잘난 여성의 존재는 가부장제에 해가 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가부장제 유지를 위해 여성이 성인, 혹은 결혼 가능한 시기가 가까워지면 그들의 재능을 숨기고 “여성”으로서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 유명한 모차르트, 그러니까 18세기 말에 활동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어릴 때 누나인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애칭 나네를)와 함께 남매 신동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두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 성인이 되자 볼프강만 데리고 다닌다. 당시에 여성의 역할이라고 했던 아내로 사는 삶을 위해 신부수업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는 여성이 음악 활동을 하는 것도 환영하지 않았다.

변화의 과도기였던 18세기였기 때문일까? 시간이 흘러 자유로운 인간의 사고를 찬양하던 19세기도 여성의 음악 활동이 제한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평을 들었던 클라라 슈만은 작곡이나 피아니스트로서의 업적이 아니라 극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더 잘 알려졌다. 남편 로베르트 슈만과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의 소송전을 통한 결혼, 먼저 죽은 로베르트 슈만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평생 헌신한 삶, 천재 음악가 브람스가 평생 짝사랑했던 이야기. 클라라 슈만은 음악사에서 주체가 아닌 객체로만 남아 있다. 그것도 그나마 그 천재 음악가들 사이의 로맨스가 유명해서 이름이 많이 남은 것이다.

파니 헨젤은 한여름 밤의 꿈 중 결혼행진곡, 무언가, 바흐의 재발굴로 유명한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이다. 그의 작품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본인의 이름으로 출판하는 것은 가족의 굉장한 반대가 있었다.[각주:4]

“시작부터 네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단다....나는 출판을 시작했어. 내가 출판하는 것으로 인해 네가 불명예를 당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창작을 위한 자극을 항상 필요로 해왔어.”[각주:5]

위와 같은  편지가 남아 있을 정도였다.

파니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도 이야기하였다.

“음악은 펠릭스에게는 직업이 될 수 있겠지만, 너에게는 결국 장식에 불과할 뿐이며 너의 존재나 활동의 기반은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펠릭스에게는 명예와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야망이 무척 중요한 일이란다. 왜냐하면 그는 음악을 천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너에게는 정숙하게 행동하는 것이 곧 명예로운 일이란다. 가령, 동생에게 쏟아지는 갈채를 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함으로써, 타인으로 하여금 너 또한 존경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리라. 여자스러운 것만이 여성의 자랑이 될 수 있으니까.”[각주:6]

그런데 가부장제는 여성에게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일까? 


-성차별의 비극 "카스트라토"

교회에 고음 성악가가 필요했지만, 여성에게 노래를 금지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남성이 가성과 기교를 통해 소리를 내는 카운터테너를 사용하였다. 카운터테너는 가성(falsetto)을 사용한다고 하여 팔세티스트(Falsettist)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이 팔세티스트는 별로 선호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소프라노로는 한계가 있는 데다 오페라의 등장과 로마 주변의 여성 성악가 제한으로 팔세티스트가 필요했다.

17~18세기 들어 여성 성악가들을 고용하지 못하는 로마와 그 영향을 받는 지역에도 고음 성악가들의 수요가 많아졌다. 하지만 고음 성악가의 양성이 어려웠다. 소년 단원의 주기적 교체, 팔세티스트의 갈라지는 것 같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평생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는 카스트라토가 주목받았다. 당시 팔세티스트의 목소리는 인공적인 소리로 간주하였지만, 카스트라토의 소리는 ‘자연스러움’, ‘진실함’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카스트라토를 더 선호했다.

카스트라토는 남성 호르몬을 생산하는 고환을 변성기 전에 제거한 거세 성악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카스트라토에 대한 선호 때문에 18세기 이탈리아에서는 해마다 4000여 명의 소년이 거세될 정도였다. 1903년 공식적으로 금지하기 전까지 수많은 소년이 남성성을 제거당했다.[각주:7] 심지어 성공한 카스트라토는 1% 내외에 불과했고, 나머지 카스트라토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카스트라토의 삶을 일부 엿볼 수 있는 영화 『파리넬리』를 보면 파리넬리는 형이 작곡가로서 성공하기 위한 발판으로 쓰이기 위해 거세당한다. 가부장제와 성차별의 화살이 어린 남성 아동을 향한 것이다.


차별과 배제는 당하는 이가 정당하게 학습한 내용과 재능을 묻어버리는 일뿐 아니라, 다른 형태로 차별과 배제의 주체인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공정함을 원하면 “역차별”이라는 말-이 되는지 알 수 없는 말-을 쓰기보다 내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권리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우선 아닐까? 다른 쪽에서 받은 차별을 더 만만한 곳에 쏟아내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각주:8]

  1. 『근대 여성 음악가들의 지위와 활동에 대한 통찰』 최은아,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11) p.3 재인용 [본문으로]
  2. 『근대 여성 음악가들의 지위와 활동에 대한 통찰』 최은아,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11) p.1 재인용 [본문으로]
  3. Carl E. Seashore, “Why No Great Women Composers?”. Neels-Bates, Carol(ed). Women in Music : An Anthology of source Readings from the Middle Ages to the Present. Boston: Northeastern University Press, 1996, p.299. 『음악사 다시 생각하기 : 19세기 여성음악가들의 글을 중심으로』, 홍인경,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2008) p.20 재인용 [본문으로]
  4. 『근대 여성 음악가들의 지위와 활동에 대한 통찰』 최은아,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11) p.27 [본문으로]
  5. Marcia J. Citron. "Fanny Medelsohn Hensel: Musician in Her Brother's Shadow". Women Making Music: The Western Art Tradition, 1150~1950.(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86)p.158 『근대 여성 음악가들의 지위와 활동에 대한 통찰』 최은아,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11) p.46 재인용 [본문으로]
  6. 에바 리거, 『서양 음악사와 여성』, 김금희 역(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1), p.259, 『근대 여성 음악가들의 지위와 활동에 대한 통찰』 최은아,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11) p.6 재인용 [본문으로]
  7. 『카스트라토와 카운터테너에 대한 연구』 전영호, 중앙대학교 대학원 음악학과 성악전공 석사학위 논문(2006) p.26~27 [본문으로]
  8. 이 글은 내가 학교에서 서양음악사 수업을 할 때 한 번씩 하는 수업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 내용을 갖고 수업하는 이유는 이 각주가 달린 문단이다. 혹시 수업자료가 필요하신 분은 보내드리겠습니다. 토론이나 질문도 환영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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