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을 본 건 개봉한 주 평일 낮이었다. 관객은 반 이상 들어차 있었다. 얼마나 힘들게 개봉했는지 흘러나오던 이야기, 단체 관람을 시켜준 어느 교사 이야기, 소녀상 이야기, 위안부 협정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다른 관객도 나처럼 비슷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앉아 있을 것 같았다. 조명이 꺼지고 비상구 안내가 나왔다.

영화를 보면서 당황했다. 점점 기분이 나빠졌고, 머리도 아파졌다. 아리랑이 나왔을 때 소름이 돋고 구역질이 났다. 그래도 평소처럼 엔딩크레딧 끝까지 화면 보고 있었다. 중간에 울며 나가는 관객이 눈에 들어왔다. 왜 저 사람들은 울면서 나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는지 얼굴 경련에 구역질이 더 올라오는데.


- 귀향에 대한 찬양뿐, 비평은 실종

나처럼 보러 갔다가 끔찍한 기분으로 나온 사람은 꽤 많았다. 하지만 영화 잡지에서는 그 끔찍함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이동진 평론가의 짧은 평 정도가 세련되게 영화의 문제를 지적한 정도였다. 그 외에는 영화 뒷이야기와 영화에 관한 긍정적인 기사만 있었다. 평론가가 아닌 일반 관객들이나 영화전문 사이트에서 댓글로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블로그에 글도 쓰고, 내 평에 대한 비난에 반박하면서 계속 기사를 찾아보았다. 몇 년 전 디 워 광풍과 26년에 대한 학습 때문인 건지, 영화를 볼 필요성조차 못 느꼈던 건지 몰라도 영화 자체에 대한 비평가들의 비평은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더 지나 300만이라는 흥행에도 여러 매체에서 비평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여전히 나오는 것은 얼마나 힘들게 영화를 만들었느냐는 감독 인터뷰, 단체 관람 미담, 출연자에 대한 소식뿐. 그러다 발견한 『[손희정의 영화비평] 어떻게 새로운 ‘우리’를 상상할 것인가』는 가뭄의 단비 같았다. 영화적 텍스트 비판에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논의에 대한 스펙트럼을 줄일 것 같아 아쉬운 부분이지만, 비판적 논의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데 목을 축일 수는 있었다.


- 귀향을 불편하게 여기는 시선

1. 인간을 물건으로 여기는 모습

귀향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 중 하나는 성폭력을 전시하는 장면이다. 그중 최악은 카메라가 하늘로 올라가며 쪽방촌 전체에서 벌어지는 강간을 동시에 보여주는 부분이다. 스너프 필름을 모은 전시회에 온 기분이 들었다. 실화를 묘사한다면, 그 묘사하기 위해 연기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상처는 어디 가서 회복해야 할까? 정신치료를 받으면서까지 묘사를 해야 할까? 아픔을 달래기 위해 했다면, 다른 사람들도 아프게 해야만 그 아픔을 달랠 수 있는 것일까?

맥락적인 당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을 후려치며 벗기는 장면, 초경도 하지 않았다고 실실대는 장면 등 단지 잔인함을 쌓아가며 잔인함의 절정을 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잔인함의 절정 후 각자의 이야기를 전시하듯 지나치며, 또 다른 잔악함의 전시만 풀어가듯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사건이 중첩되며 변화도 없이 쌓이기만 한다. 그 사건이 쌓이며 어느 인물도 변화 없이, 사건의 이유를 만들기 위해 소모적으로 이용하기만 한다.


2. 가부장적 민족주의 서사

또 불편한 부분은 가부장적 민족주의 서사이다. 극은 과거와 현재로 나누어 따로 나누어 진행하는데, 과거와 현재를 잇기 위해 공통점을 부여한다.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다. 여기서도 가부장적 차별이 나타난다. 아버지와 다르게 어머니는 “신비의 영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나마도 과거의 어머니는 복선의 역할이라도 하며 더 큰 의미를 주지만, 현대의 어머니는 아이를 신당에 두고 가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아버지 역시 장치적 역할에 불과하긴 하다. 하지만, 과거의 “아버지를 더 따르는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외동딸과 침략자에게 빼앗겨도 무력한 아버지”와 현재의 “아버지가 사랑스러운 외동딸이 강간당하는 모습에 분노하여 달려들다 죽는 무력한 아버지”라는 형태를 통해 딸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더 강하게 묶어 버린다. 여기에 목숨을 걸고 소녀들을 구출하는 광복군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등장할 때 아리랑을 내보내면서 “조국의 딸”이라는 가부장적 민족주의를 완성한다.


3. 굿을 통한 타자화

굿 또한 불편하다. 굿은 해소하는 역할을 하기보다 가부장적 민족주의를 완성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굿을 통해 이어주는 것은 두 성폭력 피해자이다. 신기가 있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위안부라는 성폭력에 당하고 사망한 피해자를 빙의시킨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는 사죄하고 빙의된 이는 안심시킨다.

그 장면에 앞서 행정 기관에서 “내가 그 미친년이다”라며 생존자가 외치던 장면이 있다. 소리치는 행위를 통해 피해 사실을 숨기고 죄책감에 숨어 지내던 가엾은 이에서 생존하여 사과를 받아낼 주체로서 각성한 그는 이후 미안하다는 사과를 통해 다시 죄인으로 각하된다. 빙의한 이가 괜찮다며 사과를 받아주며 과거와 만나 갈등을 풀지만, 그렇게 성장을 뒤집으며 다시 무력한 개인으로 만든다. 그들의 당당한 주체로 사는 삶을 빼앗아 의존해야 할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 영화 자체를 텍스트로 삼은 비평이 먼저 필요한 이유

이런 불편함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는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그래서 영화라는 텍스트에 대한 비평이 더 필요하다. 진부한 재현에 대한 비판이라는 이유로 텍스트 비판도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귀향이라는 작품이 수많은 시민의 동참이 있기에 가야 할 지향점이 있더라도 텍스트에 대한 비판과 토론 없이 나아간다는 것은 영화라는 예술을 도구 취급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소재가 소재인 만큼 작품과 표현을 온전히 예술적인 문제로만 다루기 쉽지 않다. 표현 그 자체는 도구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 자체를 다양한 시선으로 논하는 행위 없이 분노를 일으키는 정치적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체제 선전 영화와 다를 것이 있을까? 또한, 흥행한다고 우리에게 어떤 힘이 생기는 것일까?

힘들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중요하지 않다. 힘들게 만들지 않은 영화는 없다. 수많은 사람이 온갖 상상을 좋은 목적으로 영화로 만들고자 한다. 힘들게 만들었다는 것은 영화를 보고 이야기할 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관람 못지않게 비평은 중요한 예술적 행위이다. 그 진부한 예술적 행위를 계속하는 것은 창작이라는 예술적 행위의 좋은 밑거름이 된다. 비평가는 관람객을 비평하지 않는다. 작품을 비평한다. 당신이 보는 재미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더 좋은 예술을 위해 비평한다.

별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생각하게 되는 영화가 있다. 2016년 3월 15일 현재[각주:1] 여전히 흥행하고 있는 영화 『귀향』이다. 이 영화의 이름을 접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경로이다. 귀향 흥행 기록 기사와 왓챠에 단 귀향 코멘트에 댓글이 달릴 때마다 오는 알림 때문이다. 특히 귀향 코멘트에 단 댓글을 볼 때 대부분 한숨이 나온다. 어떻게 읽으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소재의 내용과 유래”에 대한 비난으로 생각한다.

뭐 거기까지는 좋다. 어떤 사람은 팩트가 없다고 하면서 영화를 본 팩트가 없다. 한국 사람을 강조하는 사람은 내 국적을 부정하려 한다. 그것이 정의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의 자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정의는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정의가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나마 『디 워』 때의 수준 낮은 논쟁에 비하면, 최근의 여성혐오 이야기와 페미니즘 이야기 덕에 훨씬 나은 수준의 이야기가 오간다. 그때의 막무가내 애국심에 비하면 다행처럼 보인다.

혹시나 나 말고 또 이런 댓글 달리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았다. 왓챠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비평가들의 이 영화 비판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이동진 평론가의 짧은 평이 세련되게 영화와 소재 둘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이 거의 전부다. 어쩌면 이 영화는 애초에 그렇게 평할 생각도 안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외적 논란이 두렵거나, 볼 가치를 못 느꼈거나.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평가는 어떤 부분을 중심에 두고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외적 의미, 내적 의미, 의도, 표현, 내용, 소재, 주제 등 다양한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외적 의미와 의도, 소재 등 작품 밖에서 애써 좋은 의미를 찾는 것이다. 어떤 예술이든 거기에서만 그치면 상업성 말고 남는 것이 없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한다고 안 좋은 것이 좋은 것이 되지 않는다. 애써 좋은 의미를 부여해도 표현 방식에서 혐오가 작용하면 옳지 않다. 문제가 있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 귀향 비난에 대하여 달리는 왓챠 코멘트

왓챠에는 『귀향』에 대한 감상 별점을 0.5점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코멘트를 달았다. 별점만 남으면 나중에 이유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 삼은 것은 군인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을 군인들이 구하는 서사, 아리랑을 통해 강조하고 반복하는 민족주의적 시각, 성 착취의 전시였다. 정확하게는 아래와 같이 썼다.


내 예상 별점이 4.0이라니… 난 0점 주고 싶다.

군인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을 군인들이 구하는 서사도 역겨웠고, 아리랑을 통해 강조하고 반복하는 민족주의적 시각도 역겨웠다. 굳이 쪽방촌의 성착취를 전체적으로 보여줄 필요도 있었을까? 애써 굿을 하기 위해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고놈의 아리랑이 흘러나와 사람 속을 다 뒤집어 버렸다. 그들의 피해는 민족적인 피해가 아니다. 개인적인 피해이고 사회구조적인 피해이다. 넋을 달래는 것은 그들의 아픔을 달래는 것이다. 그들의 아픔을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민족을 달래려는 그 시도가 굉장히 역겨운 영화였다.


여성으로 추정되는 사람이나 대부분은 “마음에 걸리던 부분”, “공감” 등의 이야기를 하거나 해석에 대한 다양성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한 명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어떻게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인 개개인들의 피해가 민족적인 피해가 아닐 수 있죠?? 시대를 좀 보세요. 위안부야 말로 실은 강점 치하에서 조선인들의 피해와 죽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위안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피해인 세월호 사건만 해도 궁극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인데... 해방된지 겨우 70년 됐는데 먼 옛날 얘기고 내 얘기 아니라 이거죠? 결국 남의 얘기로 치부하니까 이따위로 평가 절하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말 그대로 남이사, 남이 죽든 말든 인 거죠. 민족이라는 거창한 말 필요없이 이웃이 끌려가서 당한 이야기입니다. 1988 쌍문동 이웃이 끌려간 이야기라고 말씀드리면 이해가 좀 쉽겠습니까, 야박하고 매정한 현대인들이여?

덧붙여 위안부가 사회구조적인 피해라고는 하셨는데 저는 동시에 민족적인 피해도 맞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 시대에 친일파 말고 어느 조선인이 자유로웠습니까? 독일 나치에 의한 유대인들의 피해가 민족적인 피해가 아니었나요???


저는 이렇게 야박한 현대인이 되었습니다. 성격이 그렇게 유들유들한 편이 아니라 바로 비꼬면서 민족적인 피해라는 말의 문제를 지적했다.


우와… 민족주의자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위안부는 민족적인 피해라기보다 기지촌까지 이어지는 여성적인 피해이고 사회시스템적인 피해입니다. 여성을 개인의 완전한 인격체거나 사회적 약자가 아닌 소유물로 치부하니까 민족적인 피해라고 하는 거죠. 여성이 민족의 소유물입니까? 거기에 위안부로 중국인까지 등장하는데 그걸 민족적인 피해로 축소하는 것이야 말로 반인권적이고 몰염치한 관점 아닙니까? 어때요? 나도 이렇게 당신의 말이 남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면서 매정하고 인간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개개인을 민족의 소유로 여기고 있고, 가족의 소유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곰곰이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다시 그는 본인의 주장을 번복하지 않은 채 반박을 위한 주장을 덧붙였다.


감독이 어느 부분에서 여성을 민족의 소유물로 바라봤습니까? 이 영화는 그야말로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영화입니다. 민족적인 피해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고요, 아까도 말했듯 사회구조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민족적인 피해입니다. 덧붙여 중국인을 등장시키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등장시킨 것이 오히려 탈민족적으로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실제로 네덜란드인 위안부 피해여성도 실존했습니다) 보편적인 일제의 폭력이고 피해의 역사였다고 말하는 게 보이지 않으시나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또 감정적으로 댓글을 달았다.


영화를 보긴 보셨습니까?

1. 한 번 등장한 중국인을 등장시킨 것이 보편적인 피해의 맥락을 이야기한다고 보기에는 무리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나요? 애초에 등장 안 시키면 모르되 한 명, 그것도 대화도 제대로 안되는 상황을 보편으로 승화한다고요? 그 장면이야 말로 중국인을 소모품으로 삼아 민족적인 피해라고 더 강변하는 장면입니다.

2. 칼로 희롱당하던 은경을 보고 은경의 아버지가 강도를 덮치려다 강도에게 살해 당하는 장면과 아버지를 사랑하던 정민이 일본 군인에 의해 납치 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둘 모두 외동딸입니다. 이런 가부장적 질서의 병렬적인 나열을 통해 민족적 아픔으로 진입을 시도 합니다. 거기다 외동딸이라는 장치를 통해 무엇보다 소중한 아버지의 딸이라는 상징을 만듭니다. 더불어 접신이라는 것을 통해 동일시 하는데, 은경의 몸에 빙의한 것은 정민입니다. 이렇게 두 번째 연결고리를 만들어냅니다. 굿과 광복군의 구출이라는 것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려 합니다. 이렇게 세 번째 고리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에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리랑을 통해 모든 고리를 이어버립니다. 이렇게 다중적 장치를 통해 감독은 보편이 아닌 민족이라고 강변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와 실제 위안부 문제를 섞어서 생각하시다보니 영화의 수준이 낮음을 지적하는 것이 위안부 문제 자체를 피해 간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분리해서 평을 보면 확실히 다르게 느껴지실 겁니다. 그리고 왜 여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평가 점수를 낮게 주는지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며칠 후 뜬금없는 댓글이 하나 달렸다.


실제로 이 증언을 하신 할머니도 미군에 의해 구해진거 아니었나요?


이 글을 읽고 며칠 전에 페이스북에 내 블로그 포스트를 링크한 데에 비슷한 내용의 댓글이 달렸던 것이 생각났다. 내가 단 댓글 내용은 생각나지 않아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최대한 영화와 실화를 분리해보았다.


실화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가 실화를 포장하는 방식의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아픔을 민족과 가족으로 포장해서 피해자의 아픔보다 국가와 민족이 아픈 것이라고 포장해버립니다. 개인에게 사죄하고 보상, 배상해야할 책임은 국가(일본)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사과받아야할 주체는 개인입니다. 국가(대한민국)와 민족이라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상실감과 죄책감, 무력함으로 표현하면서 개인의 싸움을 돕기보다 분노를 분출하고, 개인을 삭히는 데 집중합니다. 전쟁의 주체 자체가 공포인데, 전쟁의 주체만이 해결할 수 있는 양 표현한 것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후로는 열혈 논쟁가들도 지친 건지 관심이 없어진 것인지 몰라도 문제 삼는 댓글은 더는 달리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페이스북에 달렸던 코멘트가 생각났다.



- 영화 『귀향』은 민족주의 성폭력 영화 포스트 링크를 건 페이스북 포스트에 달린 코멘트


페이스북에는 이전에 쓴 글의 링크를 올려서 포스팅했다. 여기 달린 첫 댓글은 이랬다.


내가 아직 안봐서 정확한 비평을 하기 어렵지만 링크한 이 비평은 필자의 표현대로 역겹군...

서사구조 어쩌고 말하는데, 귀향에 나오는 이야기 대부분이 할머니들 진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여부에 대한 확인이 글쓰기와 비평의 기본인데 사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막휘갈겼군.

글쓴이가 역겹고 불편했던 이유는 그것이 민족주의 성폭력 영화라서가 아니라 과거의 슬픈 역사가 부끄러워서 그런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비평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힘겹게 글을 봤는데, 정말 짜증난다. 

사실에 대한 비평(위안부 할머니의 고통이라는 사실과 귀향 영화라는 사실)은 없고 무식해서 불편한 자기 감정 배설 뿐이로군... 에효


솔직히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아직 안봐서 정확한 비평을 하기 어렵지만”으로 시작해서 “사실여부에 대한 확인”과 “사실에 대한 비평”이라는 말을 하며 사실에 대한 예의를 거론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과거의 슬픈 역사가 부끄러워서 그런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말과 “무식”하다는 말까지…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아는 사람과 페이스북에서 댓글 논쟁은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좀 방어적으로 이야기했다.


미안합니다… 제 글입니다…

영화를 보셔요. 진술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 진술을 어떻게 감싸느냐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몫이죠. 그래서 진술과 일치하더라도 포장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죠. 그래서 표현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요.

고통을 표현할 때, 굳이 포르노그래피나 스너프필름을 보여줄 필요는 없죠. 위안부 할머니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은 이 영화에요. 강간 당하는 소녀의 아버지가 강간을 말리다 칼에 맞아 죽는 현대와 나라 빼앗긴 탓에 무력한 일제강점기의 아버지를 병렬로 나열하지요.

과거만 이야기했다면 훨씬 나았을 거에요. 굳이 현대로 끌어들이면서 아리랑으로 마무리 하지 않았다면… 난 여성을 도구적으로 다룬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에요


확실히 누그러진 투로 이야기하면 상대도 누그러지게 이야기한다. 달린 댓글은 이렇다.


귀향을 현재를 보았다면 더 적절한 토론이 가능했겠지. 할머니들이 당했던 일들에 대한 적절한 포장방법을 나는 모르겠더라. 그들이 겪었던 일들을 절절히 느끼게 할려면 그건 포르노 중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포르노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이외의 방식으로 만드는 경우 아무리 잘 표현해도 그녀들이 느꼈던 고통과 절망의 백만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하지...

우린 그녀들의 아픔도 제대로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고 그런 아픔을 제대로 표현하도록 지원하지도 못하고 있지.

글에서 지적했던 것들은 모두 이 두종류 중 하나에 속해 있다. 영화나 영화제작자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사화상이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그런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했고 소화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

저예산과 공론화부족(이해부족) 속에 만들어진 영화지. 난 아에 칼리큘라처럼 더욱 명확하게 만드는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거기 나온 배우들 전부 심리치료 받아가면서 영화찍었다. 여배우들은 잠도 못자면서 영화찍었다더군...


저는 귀향을 보면서 그것을 왜 개개인의 아픔을 민족적 아픔으로 포장했어야 했는지 모르겠어요. 군인만 봐도 기겁해야 할 것 같은데, 군인에 의해 구출되는 장면에서 굳이 아리랑이 나와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메시지를 줘야 했을까요? 주인공이 아버지와 함께 노래 부르던 밀양아리랑도 아니고, 중간에 누가 부른 노래도 아니고 왜 하필 아리랑인 걸까요? 왜 아버지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반복한 걸까요? 중국인 위안부도 나왔는데… 왜 여성 개개인의 그 끔찍한 고통이 아니라 하필 민족으로 승화시키는 건가요…

심리치료 받아가면서 잠도 못자면서 영화 찍었다는 것도 끔찍해요.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 일이라며 누군가 소모된다는 것이 무서워요.


영화를 보고나서 더 정확한 토론이 되겠지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메시지는 할머니들이 받은 피해가 그녀들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문제라는 점의 표현이다. 민족주의적인 표현일 수 밖에 없는 그 표현이 나온건 할머니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부끄러운게 아니라 어린 아이들을 지키지는 못한 나라와 권력자들이 부끄러워 해야한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바로 세우셨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은 정확히 말하면 할머니들이 듣고 싶어 하셨던 말이다.

돈이든 대의든 직간접적인 강요해서 소모한 것이라면 매우 끔찍한 것이겠지. 그들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 너역시 예술가이니 알겠지만 그들이 하고싶어서 한 일에 대해서 옆에서 뭐라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적 강요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끔찍하다고 회피만 할 수도 없고 나는 끔찍해서 못하지만 타인은 다를 수도 있겠지...


솔직히 더 댓글을 달 자신이 없었다. 전의 포스트는 썩 잘 쓴 글도 아니었다. 분명 감정적인 글이었다. 차라리 왓챠에 달았던 댓글이 더 논리적이었다. 영화에서 여성문제와 사건의 폭력적 전시를 갖고 문제 제기했는데, 그 글에 대해 들은 평은 없고, 오로지 실제 사실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나보고 예술가라고 하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 예술가라고?


예술가, 난 예술에 속하는 학문인 음악에 대한 학위를 갖고 있다. 음악학사 딱 하나뿐이다. 그리고 악기 연주를 하거나 작곡, 편곡을 하기도 한다. 더불어 겉으로 보이는 나의 복장 역시 화려한 편이다. 거기에다 자아가 강해서 어디에 가든 충돌이 잦다. 언제나 끝까지 지지 않으려고 해서 더 충돌이 잦다. 그래서 그런가? 주변에서는 나를 볼 때 예술가로서의 인상이 강한 모양이다.

예술가라는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일까? 타인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는 인간일까? 타인이 하고 싶어서 한 일에 대해서 가만히 두는 인간인 걸까? 대의가 따른다고 뭐든 하는 인간인 걸까? 예술이 사회 안에서 예술 행위로서 기능하려면 창작자, 작품 공연자, 관람자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 평가하는 행위도 있다. 예술가는 타인의 예술 행위의 장단점을 분석하거나 문제를 제기하여 반면교사 삼을 기회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이해해야 할까, 예술가이기 때문에 문제를 더 제기해야 할까?

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문제를 더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직업은 직업윤리라는 것을 갖는다. 모두가 합의한 것이 아니어도 각자 직업윤리라는 잣대를 갖고 있다. 나는 목적을 갖는 예술의 존재를 인정한다. 단 그런 예술의 경우 “어떤 목적을 위한 예술을 한다면서 예술을 위해 목적이 되는 존재를 소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잣대로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그 예술에 외부적 목적이 있다면 중간 목표가 있을 것이고, 목표 달성을 염두에 두고 어떤 과정으로 할 것인지 고민이 있을 것이다. 일단 목적이 옳다면,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목표를 설정하든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 목표도 옳다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과정이 어떻든 문제가 없는 것일까? 오랜 시간을 진행하다 보면 목적을 잃고 표류할 수도 있다.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목표 역시 바르게 설정했다면, 그 목표를 위해 어떤 과정을 선택하든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래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작품과 소재를 적절하게 분리하려 노력해야 한다. 소재는 그 자체로 주제가 아니고, 수많은 요소 중 하나다. 소재가 집중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주제를 해치게 된다. 혹은 소재 자체가 목적이나 목표가 되면 소재를 전시하는 데서 그치게 된다. 만약 소재가 인간의 어떤 삶일 경우 재현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가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소재의 분리는 굉장히 중요하다.

목표 중 하나가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고발일 경우 소재의 전시는 고발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쉬운 방법이 된다. 그래서 예술가는 소재의 전시라는 쉬운 선택의 유혹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소재를 전시하지 않고 고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행위는 정말 어렵다. 하지만, 어렵다는 이유로 쉬운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미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길에 소재가 된 존재 혹은 소재를 다루는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다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행위일까?



- 내 비판은 당신의 마음을 판단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감상은 작품과 상호작용하는 주체적인 예술 행위이다. 사람에 따라 작품의 목적, 작품의 내용, 작품의 소재, 작품의 제작 과정 등 작품 안에서 관심을 두는 부분이 다르다. 또한, 살아왔던 삶, 신념, 평소 관심사, 계층 모두 다르다. 그래서 개개인이 작품을 감상한 후, 혹은 감상하며 상호작용하는 사이에 파생되어 나타나는 것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작품 자체가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고발이라는 데서 응원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나처럼 작품 자체가 비윤리적 행위를 전시한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민족적인 정서를 자극하여 민족의 치유에 중점을 두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나처럼 민족적인 정서로 개개인의 피해를 덮는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형태의 상호작용이다.

다른 의견이 나온 것은 똑같이 작품에 대한 다른 형태의 상호작용이 나온 것일 뿐이다. 소재가 된 사람이나 소재가 된 내용을 비난하는 행위가 아니다.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대부분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영화를 본 것은 그 공포에 대하여 전시하는 것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재가 된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기 위해서 본 것이다. 그들은 그 마음에 공감했기 때문에 더 불편해서 비판한 것이다.

나도 비슷하다. 그래서 감독의 표현 방법이 불편했다. 실화라고 해도 극영화라는 예술작품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내내 영화에 대해서만 지적했다. “영화가 실화를 포장하는 방식이 폭력적”이라고 느꼈고,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아픔을 민족과 가족의 아픔으로 포장”하여 “피해자의 아픔보다 국가와 민족의 아픔”으로 바꾼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 영화가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과 2015년 위안부 문제 협상의 폭력성, 밀양 집단 성폭력 사건에서 멋대로 합의해서 돈을 받아 탕진한 아버지의 폭력성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두 협상 모두 “개인에게 사죄하고 보상, 배상해야할 책임은 국가(일본)”에게 있고, “사과받고 배상 받아야 할 주체는 개인”인데, “국가(대한민국)와 민족이라는 공동체”가 멋대로 대신 받고 알았다 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 밀양에서 있었던 집단성폭력 사건 역시 친고죄 조항 덕에 합의 종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2차 피해뿐 아니라, 멋대로 합의해서 돈을 받아 가로챈 아버지가 있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비슷한 모습이다.

그런 협상과 사건들이 있었는데, 아직도 싸우는 분들을 두고 영화는 그 사건을 “상실감과 죄책감, 무력함으로 표현하면서 개인의 싸움을 돕기보다 분노를 분출하고, 개인을 삭히는 데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전쟁의 주체 자체가 공포인데, 전쟁의 주체만이 해결할 수 있는 양 표현한 것”을 보고 이후에도 이어지는 여성을 성적 도구화한 기지촌까지 생각나서 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없었다.

이건 내가 아는 것과 내가 겪은 것, 나의 사고방식에 의한 나의 상호작용이다. 위안부 피해자를 부끄러워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영화 때문에 더 상처받을 사람이 있을까 마음이 더 아팠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대리할 수 없다. 작품도 그들의 아픔을 대리할 수 없다. 작품의 관람도 그들의 아픔을 대리할 수 없다. 작품이 알려진다고 해도 그들의 아픔을 대리할 수 없다. 자칫 주체가 바뀌는 일이 생길까 두려운 것이 내 상호작용의 배경이다.

타인의 상호작용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영화를 보고 느낀 마음이 옳다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영화를 만든 과정을 보고 느낀 마음이 옳다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느낀 영화의 소재에 대한 아픈 마음이 옳다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를 이야기할 때 외적인 요소를 끌어오는 것은 소재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거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당신의 마음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1. 포스팅한 날짜가 아닙니다. 글을 오래 쓰다보니 글 쓰던 중에 기록한 날짜입니다. [본문으로]
  1. 얌마 2016.08.12 16:56 신고

    니가 그냥 관종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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