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가서 선임이 비누 주워달라고 하면 비누 줍지 마라."

선배는 그렇게 말하고 낄낄댔다. 나는 거기에 대고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너무 무력했다. 화를 낼 수도 없다. 기억에 대고 화를 낼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 뜻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미 몇년이나 지난 일일 뿐 아니라 앞으로 그 선배를 만날 일도 없다. 갑자기 떠올라서 수치스럽고 두렵기만 하다.

숨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있는 그를 오래 쳐다보고 싶은데, 오래 쳐다볼 수 없었다. 한참 쳐다보면 그는 내게 왜냐고 물을 것 같다. 그러면 난 할 말이 없다. 자꾸 쳐다보고 싶을 뿐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내가 남자를 보고 두근 거리는 건 괜찮다. 나는 내가 남자도 좋아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문제는 갑자기 비누가 떠올라서 수치스럽고, 들키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두렵다.

다음날부터 그를 볼 일은 없을 거다. 잠깐 눈에 뭐가 씌었던 것처럼 그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분위기만 기억나고 내 두근거림만 기억난다. 두려움이 커졌다. 내가 그를 보고 두근거렸다는 걸 들켰으면 어떻게 할지 두렵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게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런 두려움만 커졌다.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그는 눈치도 못 챘을 것이다. 좀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보니 이상한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그 자체만으로 두려워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내가 사람을 보고 두근거리고 호감을 갖는 건 내 의지로 하는 게 아니다. 나도 모르게 그런 반응이 나타나는 건데, 두려워하다니 이상하다.

그 선배의 혐오스런 농담 때문인 것 같다. 그 말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났을 때 다른 선배를 예로 들며 그 선배가 굉장히 여성스러워서 게이 같다느니, 서울에서 여장한 걸 봤다느니 하며, 나 보고 꼭 닮았다며 낄낄댔다. 그렇게 수치심을 내게 줘서 수치심이 쌓이고 자기 검열을 한 것 같다.

지금은 눈을 피하지 않는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티를 낸다. 바이섹슈얼이라고 커밍아웃한 이후에는 두렵지 않다. 치마 입고 다닌지 오래 되다 보니 그 선배의 말은 이젠 별로 안 신경 쓰인다. 상처받아서 한동안 움츠러든 것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남자를 보고 두근거리지 않는다. 길거리를 다녀도 예쁘거나 잘생긴 여자는 많은데 잘생긴 남자가 진짜 안 보여서 그렇다. 난 얼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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