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Probably gay"를 보고 재미있어서 가사를 번역해봤습니다.



There’s a word called “homophobic”

But confusion as to how it’s used

"동성애 혐오"라는 말이 있는데,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혼란스러워.

It doesn’t mean gay folks are scary

Like they portray on FoxNews

폭스뉴스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단순히 게이를 무서워한다는 의미가 아니야


It doesn’t mean you should be scared

They’re gonna destroy your way of life

네 삶을 망칠 것 같아 무서워하는 게 아니었어.

And it doesn’t mean that if they get married

It ruins your relationship with your wife

그리고 그들이 결혼한다고 네 부인과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것도 아니잖아.

 


What the -phobic part means

At the end of the day

결론적으로 말해, "혐오"라는 부분이 뭘 의미할까?

Is not that your afraid of gay people

But you’re afraid that you might be gay

게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네가 게이일지 몰라서 두려워하는 거야


CHORUS:

Yes, I'm sorry to be the one that has to say

그래, 미안하지만 분명히 말할게

If you're homophobic

네가 호모포비아라면

You're probably gay (x4) 

넌 아마도 게이.


Hear me out, now. Case in point:

요점만 말할테니, 내 말을 들어

In 1996

1996년도에

In the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

이상심리학 학술지에서

They measured a bunch of guy’s weenies

While they watched porn on tv

한 남성 집단에게 티비로 포르노를 보게 하며 그 사이에 고추 크기를 쟀어.


All the weiners swelled up

모든 고추가 부풀어 올랐어.

Watching porn that was straight

이성애자들의 포르노를 보면서 말이야.

But then the big surprise came

굉장히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Showing gay porn to men that expressed gay hate

게이를 싫어한다고 표현하는 남성들에게 게이 포르노를 보여줬더니


It seems the guys that were okay with gays

게이를 괜찮게 여기는 것 같은 남자들은

Were not aroused much by those scenes,

보면서도 별로 흥분한 것 같지 않았어

But the men that were homophobic

하지만, 호모포비아들은

Had quite a bulge in their jeans!

청바지에 뭐가 툭 튀어나왔어


“While only 34% of the non-homophobic were turned on by gay porn,

a whopping 80% of the homophobic men were.”

"동성애 혐오가 아닌 이들 중 겨우 34%만이 게이 포르노에 섰고,

동성애 혐오 남성들 중에서는 무려 80%가…"


CHORUS:

Yes, I'm sorry to be the one that has to say

그래, 미안하지만 분명히 말할게

If you're homophobic

네가 호모포비아라면

You're probably gay (x4)

넌 아마 게이



BRIDGE

An Alabama Attorney General was rumored to sleep with a male attaché

한 앨라배마 법무 장관은 남자 수행원과 잘 거라는 소문이 돌았어.

And a Washington State Representative allegedly hired a gigolo for a lay

또, 한 워싱턴 주 의원은 불륜을 위해 기둥서방을 고용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어.

And a California Congressman was accused of giving his boyfriend a fat sala-ray

또, 한 캘리포니아 하원의원은 그의 남자친구에게 과한 연봉을 주었다는 혐의를 받았어.

And an Indiana State Representative answered a gay ad for a sugar dadday

또, 한 인디애나 주 의원은 물주로서 게이 광고에 물주로서 답하기도 했어.

And a Mayor of Spokane was having sex with men who were underage

또 스포캔 시장은 미성년자 남자들과 섹스를 했어.

And do we even need to mention foot-tappin’ Larry Craig?

또 우리가 발툭툭이(foot-tappin' → 섹스 신호로 발을 툭툭 침) 래리 크레그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거야?

Now what do these men have in common, you say?

자 이 남자들의 공통점이 뭘까? 말 해봐?

Well they’re all politicians whose legislation was anti-gay!

그래 그들은 모두 반 동성애 법안을 낸 정치인이야



Anti-gay!

반동성애!

They say they’re anti-gay!

그들은 그들이 반동성애자라고 말해!

But they’re really probably gay!

하지만 그들은 진짜 게이일 거야!

You’re letting everyone know you’re gay!

넌 사람들에게 네가 게이란 걸 알게 한거야.

 


And if you feel the need to show the world

How fiercely you’re gay-opposed

그리고 만약 네가 정말 게이에 적대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었으면

Then you’re probably be better off

Just keepin’ your homophobic mouth closed!

네 동성애 혐오 발언을 닥치고 있는 게 훨씬 나을 거야.

 


Don’t be hatin’ the gays!

동성애를 혐오하지 마

Why don’ t you just go ahead and be gay?!

그냥 앞장서서 동성애자가 되어 보는 건 어때?

Some of our best friends are gay!

우리의 가장 친구 중에는 게이가 있어.

Everyone knows you’re probably gay

모두 네가 게이라고 알고 있어.

  1. 2017.12.03 20:30

    비밀댓글입니다

귀향을 본 건 개봉한 주 평일 낮이었다. 관객은 반 이상 들어차 있었다. 얼마나 힘들게 개봉했는지 흘러나오던 이야기, 단체 관람을 시켜준 어느 교사 이야기, 소녀상 이야기, 위안부 협정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다른 관객도 나처럼 비슷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앉아 있을 것 같았다. 조명이 꺼지고 비상구 안내가 나왔다.

영화를 보면서 당황했다. 점점 기분이 나빠졌고, 머리도 아파졌다. 아리랑이 나왔을 때 소름이 돋고 구역질이 났다. 그래도 평소처럼 엔딩크레딧 끝까지 화면 보고 있었다. 중간에 울며 나가는 관객이 눈에 들어왔다. 왜 저 사람들은 울면서 나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는지 얼굴 경련에 구역질이 더 올라오는데.


- 귀향에 대한 찬양뿐, 비평은 실종

나처럼 보러 갔다가 끔찍한 기분으로 나온 사람은 꽤 많았다. 하지만 영화 잡지에서는 그 끔찍함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이동진 평론가의 짧은 평 정도가 세련되게 영화의 문제를 지적한 정도였다. 그 외에는 영화 뒷이야기와 영화에 관한 긍정적인 기사만 있었다. 평론가가 아닌 일반 관객들이나 영화전문 사이트에서 댓글로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블로그에 글도 쓰고, 내 평에 대한 비난에 반박하면서 계속 기사를 찾아보았다. 몇 년 전 디 워 광풍과 26년에 대한 학습 때문인 건지, 영화를 볼 필요성조차 못 느꼈던 건지 몰라도 영화 자체에 대한 비평가들의 비평은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더 지나 300만이라는 흥행에도 여러 매체에서 비평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여전히 나오는 것은 얼마나 힘들게 영화를 만들었느냐는 감독 인터뷰, 단체 관람 미담, 출연자에 대한 소식뿐. 그러다 발견한 『[손희정의 영화비평] 어떻게 새로운 ‘우리’를 상상할 것인가』는 가뭄의 단비 같았다. 영화적 텍스트 비판에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논의에 대한 스펙트럼을 줄일 것 같아 아쉬운 부분이지만, 비판적 논의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데 목을 축일 수는 있었다.


- 귀향을 불편하게 여기는 시선

1. 인간을 물건으로 여기는 모습

귀향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 중 하나는 성폭력을 전시하는 장면이다. 그중 최악은 카메라가 하늘로 올라가며 쪽방촌 전체에서 벌어지는 강간을 동시에 보여주는 부분이다. 스너프 필름을 모은 전시회에 온 기분이 들었다. 실화를 묘사한다면, 그 묘사하기 위해 연기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상처는 어디 가서 회복해야 할까? 정신치료를 받으면서까지 묘사를 해야 할까? 아픔을 달래기 위해 했다면, 다른 사람들도 아프게 해야만 그 아픔을 달랠 수 있는 것일까?

맥락적인 당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을 후려치며 벗기는 장면, 초경도 하지 않았다고 실실대는 장면 등 단지 잔인함을 쌓아가며 잔인함의 절정을 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잔인함의 절정 후 각자의 이야기를 전시하듯 지나치며, 또 다른 잔악함의 전시만 풀어가듯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사건이 중첩되며 변화도 없이 쌓이기만 한다. 그 사건이 쌓이며 어느 인물도 변화 없이, 사건의 이유를 만들기 위해 소모적으로 이용하기만 한다.


2. 가부장적 민족주의 서사

또 불편한 부분은 가부장적 민족주의 서사이다. 극은 과거와 현재로 나누어 따로 나누어 진행하는데, 과거와 현재를 잇기 위해 공통점을 부여한다.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다. 여기서도 가부장적 차별이 나타난다. 아버지와 다르게 어머니는 “신비의 영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나마도 과거의 어머니는 복선의 역할이라도 하며 더 큰 의미를 주지만, 현대의 어머니는 아이를 신당에 두고 가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아버지 역시 장치적 역할에 불과하긴 하다. 하지만, 과거의 “아버지를 더 따르는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외동딸과 침략자에게 빼앗겨도 무력한 아버지”와 현재의 “아버지가 사랑스러운 외동딸이 강간당하는 모습에 분노하여 달려들다 죽는 무력한 아버지”라는 형태를 통해 딸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더 강하게 묶어 버린다. 여기에 목숨을 걸고 소녀들을 구출하는 광복군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등장할 때 아리랑을 내보내면서 “조국의 딸”이라는 가부장적 민족주의를 완성한다.


3. 굿을 통한 타자화

굿 또한 불편하다. 굿은 해소하는 역할을 하기보다 가부장적 민족주의를 완성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굿을 통해 이어주는 것은 두 성폭력 피해자이다. 신기가 있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위안부라는 성폭력에 당하고 사망한 피해자를 빙의시킨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는 사죄하고 빙의된 이는 안심시킨다.

그 장면에 앞서 행정 기관에서 “내가 그 미친년이다”라며 생존자가 외치던 장면이 있다. 소리치는 행위를 통해 피해 사실을 숨기고 죄책감에 숨어 지내던 가엾은 이에서 생존하여 사과를 받아낼 주체로서 각성한 그는 이후 미안하다는 사과를 통해 다시 죄인으로 각하된다. 빙의한 이가 괜찮다며 사과를 받아주며 과거와 만나 갈등을 풀지만, 그렇게 성장을 뒤집으며 다시 무력한 개인으로 만든다. 그들의 당당한 주체로 사는 삶을 빼앗아 의존해야 할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 영화 자체를 텍스트로 삼은 비평이 먼저 필요한 이유

이런 불편함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는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그래서 영화라는 텍스트에 대한 비평이 더 필요하다. 진부한 재현에 대한 비판이라는 이유로 텍스트 비판도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귀향이라는 작품이 수많은 시민의 동참이 있기에 가야 할 지향점이 있더라도 텍스트에 대한 비판과 토론 없이 나아간다는 것은 영화라는 예술을 도구 취급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소재가 소재인 만큼 작품과 표현을 온전히 예술적인 문제로만 다루기 쉽지 않다. 표현 그 자체는 도구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 자체를 다양한 시선으로 논하는 행위 없이 분노를 일으키는 정치적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체제 선전 영화와 다를 것이 있을까? 또한, 흥행한다고 우리에게 어떤 힘이 생기는 것일까?

힘들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중요하지 않다. 힘들게 만들지 않은 영화는 없다. 수많은 사람이 온갖 상상을 좋은 목적으로 영화로 만들고자 한다. 힘들게 만들었다는 것은 영화를 보고 이야기할 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관람 못지않게 비평은 중요한 예술적 행위이다. 그 진부한 예술적 행위를 계속하는 것은 창작이라는 예술적 행위의 좋은 밑거름이 된다. 비평가는 관람객을 비평하지 않는다. 작품을 비평한다. 당신이 보는 재미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더 좋은 예술을 위해 비평한다.

별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생각하게 되는 영화가 있다. 2016년 3월 15일 현재[각주:1] 여전히 흥행하고 있는 영화 『귀향』이다. 이 영화의 이름을 접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경로이다. 귀향 흥행 기록 기사와 왓챠에 단 귀향 코멘트에 댓글이 달릴 때마다 오는 알림 때문이다. 특히 귀향 코멘트에 단 댓글을 볼 때 대부분 한숨이 나온다. 어떻게 읽으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소재의 내용과 유래”에 대한 비난으로 생각한다.

뭐 거기까지는 좋다. 어떤 사람은 팩트가 없다고 하면서 영화를 본 팩트가 없다. 한국 사람을 강조하는 사람은 내 국적을 부정하려 한다. 그것이 정의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의 자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정의는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정의가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나마 『디 워』 때의 수준 낮은 논쟁에 비하면, 최근의 여성혐오 이야기와 페미니즘 이야기 덕에 훨씬 나은 수준의 이야기가 오간다. 그때의 막무가내 애국심에 비하면 다행처럼 보인다.

혹시나 나 말고 또 이런 댓글 달리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았다. 왓챠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비평가들의 이 영화 비판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이동진 평론가의 짧은 평이 세련되게 영화와 소재 둘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이 거의 전부다. 어쩌면 이 영화는 애초에 그렇게 평할 생각도 안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외적 논란이 두렵거나, 볼 가치를 못 느꼈거나.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평가는 어떤 부분을 중심에 두고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외적 의미, 내적 의미, 의도, 표현, 내용, 소재, 주제 등 다양한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외적 의미와 의도, 소재 등 작품 밖에서 애써 좋은 의미를 찾는 것이다. 어떤 예술이든 거기에서만 그치면 상업성 말고 남는 것이 없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한다고 안 좋은 것이 좋은 것이 되지 않는다. 애써 좋은 의미를 부여해도 표현 방식에서 혐오가 작용하면 옳지 않다. 문제가 있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 귀향 비난에 대하여 달리는 왓챠 코멘트

왓챠에는 『귀향』에 대한 감상 별점을 0.5점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코멘트를 달았다. 별점만 남으면 나중에 이유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 삼은 것은 군인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을 군인들이 구하는 서사, 아리랑을 통해 강조하고 반복하는 민족주의적 시각, 성 착취의 전시였다. 정확하게는 아래와 같이 썼다.


내 예상 별점이 4.0이라니… 난 0점 주고 싶다.

군인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을 군인들이 구하는 서사도 역겨웠고, 아리랑을 통해 강조하고 반복하는 민족주의적 시각도 역겨웠다. 굳이 쪽방촌의 성착취를 전체적으로 보여줄 필요도 있었을까? 애써 굿을 하기 위해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고놈의 아리랑이 흘러나와 사람 속을 다 뒤집어 버렸다. 그들의 피해는 민족적인 피해가 아니다. 개인적인 피해이고 사회구조적인 피해이다. 넋을 달래는 것은 그들의 아픔을 달래는 것이다. 그들의 아픔을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민족을 달래려는 그 시도가 굉장히 역겨운 영화였다.


여성으로 추정되는 사람이나 대부분은 “마음에 걸리던 부분”, “공감” 등의 이야기를 하거나 해석에 대한 다양성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한 명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어떻게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인 개개인들의 피해가 민족적인 피해가 아닐 수 있죠?? 시대를 좀 보세요. 위안부야 말로 실은 강점 치하에서 조선인들의 피해와 죽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위안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피해인 세월호 사건만 해도 궁극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인데... 해방된지 겨우 70년 됐는데 먼 옛날 얘기고 내 얘기 아니라 이거죠? 결국 남의 얘기로 치부하니까 이따위로 평가 절하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말 그대로 남이사, 남이 죽든 말든 인 거죠. 민족이라는 거창한 말 필요없이 이웃이 끌려가서 당한 이야기입니다. 1988 쌍문동 이웃이 끌려간 이야기라고 말씀드리면 이해가 좀 쉽겠습니까, 야박하고 매정한 현대인들이여?

덧붙여 위안부가 사회구조적인 피해라고는 하셨는데 저는 동시에 민족적인 피해도 맞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 시대에 친일파 말고 어느 조선인이 자유로웠습니까? 독일 나치에 의한 유대인들의 피해가 민족적인 피해가 아니었나요???


저는 이렇게 야박한 현대인이 되었습니다. 성격이 그렇게 유들유들한 편이 아니라 바로 비꼬면서 민족적인 피해라는 말의 문제를 지적했다.


우와… 민족주의자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위안부는 민족적인 피해라기보다 기지촌까지 이어지는 여성적인 피해이고 사회시스템적인 피해입니다. 여성을 개인의 완전한 인격체거나 사회적 약자가 아닌 소유물로 치부하니까 민족적인 피해라고 하는 거죠. 여성이 민족의 소유물입니까? 거기에 위안부로 중국인까지 등장하는데 그걸 민족적인 피해로 축소하는 것이야 말로 반인권적이고 몰염치한 관점 아닙니까? 어때요? 나도 이렇게 당신의 말이 남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면서 매정하고 인간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개개인을 민족의 소유로 여기고 있고, 가족의 소유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곰곰이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다시 그는 본인의 주장을 번복하지 않은 채 반박을 위한 주장을 덧붙였다.


감독이 어느 부분에서 여성을 민족의 소유물로 바라봤습니까? 이 영화는 그야말로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영화입니다. 민족적인 피해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고요, 아까도 말했듯 사회구조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민족적인 피해입니다. 덧붙여 중국인을 등장시키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등장시킨 것이 오히려 탈민족적으로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실제로 네덜란드인 위안부 피해여성도 실존했습니다) 보편적인 일제의 폭력이고 피해의 역사였다고 말하는 게 보이지 않으시나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또 감정적으로 댓글을 달았다.


영화를 보긴 보셨습니까?

1. 한 번 등장한 중국인을 등장시킨 것이 보편적인 피해의 맥락을 이야기한다고 보기에는 무리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나요? 애초에 등장 안 시키면 모르되 한 명, 그것도 대화도 제대로 안되는 상황을 보편으로 승화한다고요? 그 장면이야 말로 중국인을 소모품으로 삼아 민족적인 피해라고 더 강변하는 장면입니다.

2. 칼로 희롱당하던 은경을 보고 은경의 아버지가 강도를 덮치려다 강도에게 살해 당하는 장면과 아버지를 사랑하던 정민이 일본 군인에 의해 납치 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둘 모두 외동딸입니다. 이런 가부장적 질서의 병렬적인 나열을 통해 민족적 아픔으로 진입을 시도 합니다. 거기다 외동딸이라는 장치를 통해 무엇보다 소중한 아버지의 딸이라는 상징을 만듭니다. 더불어 접신이라는 것을 통해 동일시 하는데, 은경의 몸에 빙의한 것은 정민입니다. 이렇게 두 번째 연결고리를 만들어냅니다. 굿과 광복군의 구출이라는 것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려 합니다. 이렇게 세 번째 고리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에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리랑을 통해 모든 고리를 이어버립니다. 이렇게 다중적 장치를 통해 감독은 보편이 아닌 민족이라고 강변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와 실제 위안부 문제를 섞어서 생각하시다보니 영화의 수준이 낮음을 지적하는 것이 위안부 문제 자체를 피해 간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분리해서 평을 보면 확실히 다르게 느껴지실 겁니다. 그리고 왜 여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평가 점수를 낮게 주는지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며칠 후 뜬금없는 댓글이 하나 달렸다.


실제로 이 증언을 하신 할머니도 미군에 의해 구해진거 아니었나요?


이 글을 읽고 며칠 전에 페이스북에 내 블로그 포스트를 링크한 데에 비슷한 내용의 댓글이 달렸던 것이 생각났다. 내가 단 댓글 내용은 생각나지 않아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최대한 영화와 실화를 분리해보았다.


실화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가 실화를 포장하는 방식의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아픔을 민족과 가족으로 포장해서 피해자의 아픔보다 국가와 민족이 아픈 것이라고 포장해버립니다. 개인에게 사죄하고 보상, 배상해야할 책임은 국가(일본)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사과받아야할 주체는 개인입니다. 국가(대한민국)와 민족이라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상실감과 죄책감, 무력함으로 표현하면서 개인의 싸움을 돕기보다 분노를 분출하고, 개인을 삭히는 데 집중합니다. 전쟁의 주체 자체가 공포인데, 전쟁의 주체만이 해결할 수 있는 양 표현한 것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후로는 열혈 논쟁가들도 지친 건지 관심이 없어진 것인지 몰라도 문제 삼는 댓글은 더는 달리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페이스북에 달렸던 코멘트가 생각났다.



- 영화 『귀향』은 민족주의 성폭력 영화 포스트 링크를 건 페이스북 포스트에 달린 코멘트


페이스북에는 이전에 쓴 글의 링크를 올려서 포스팅했다. 여기 달린 첫 댓글은 이랬다.


내가 아직 안봐서 정확한 비평을 하기 어렵지만 링크한 이 비평은 필자의 표현대로 역겹군...

서사구조 어쩌고 말하는데, 귀향에 나오는 이야기 대부분이 할머니들 진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여부에 대한 확인이 글쓰기와 비평의 기본인데 사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막휘갈겼군.

글쓴이가 역겹고 불편했던 이유는 그것이 민족주의 성폭력 영화라서가 아니라 과거의 슬픈 역사가 부끄러워서 그런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비평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힘겹게 글을 봤는데, 정말 짜증난다. 

사실에 대한 비평(위안부 할머니의 고통이라는 사실과 귀향 영화라는 사실)은 없고 무식해서 불편한 자기 감정 배설 뿐이로군... 에효


솔직히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아직 안봐서 정확한 비평을 하기 어렵지만”으로 시작해서 “사실여부에 대한 확인”과 “사실에 대한 비평”이라는 말을 하며 사실에 대한 예의를 거론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과거의 슬픈 역사가 부끄러워서 그런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말과 “무식”하다는 말까지…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아는 사람과 페이스북에서 댓글 논쟁은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좀 방어적으로 이야기했다.


미안합니다… 제 글입니다…

영화를 보셔요. 진술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 진술을 어떻게 감싸느냐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몫이죠. 그래서 진술과 일치하더라도 포장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죠. 그래서 표현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요.

고통을 표현할 때, 굳이 포르노그래피나 스너프필름을 보여줄 필요는 없죠. 위안부 할머니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은 이 영화에요. 강간 당하는 소녀의 아버지가 강간을 말리다 칼에 맞아 죽는 현대와 나라 빼앗긴 탓에 무력한 일제강점기의 아버지를 병렬로 나열하지요.

과거만 이야기했다면 훨씬 나았을 거에요. 굳이 현대로 끌어들이면서 아리랑으로 마무리 하지 않았다면… 난 여성을 도구적으로 다룬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에요


확실히 누그러진 투로 이야기하면 상대도 누그러지게 이야기한다. 달린 댓글은 이렇다.


귀향을 현재를 보았다면 더 적절한 토론이 가능했겠지. 할머니들이 당했던 일들에 대한 적절한 포장방법을 나는 모르겠더라. 그들이 겪었던 일들을 절절히 느끼게 할려면 그건 포르노 중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포르노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이외의 방식으로 만드는 경우 아무리 잘 표현해도 그녀들이 느꼈던 고통과 절망의 백만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하지...

우린 그녀들의 아픔도 제대로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고 그런 아픔을 제대로 표현하도록 지원하지도 못하고 있지.

글에서 지적했던 것들은 모두 이 두종류 중 하나에 속해 있다. 영화나 영화제작자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사화상이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그런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했고 소화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

저예산과 공론화부족(이해부족) 속에 만들어진 영화지. 난 아에 칼리큘라처럼 더욱 명확하게 만드는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거기 나온 배우들 전부 심리치료 받아가면서 영화찍었다. 여배우들은 잠도 못자면서 영화찍었다더군...


저는 귀향을 보면서 그것을 왜 개개인의 아픔을 민족적 아픔으로 포장했어야 했는지 모르겠어요. 군인만 봐도 기겁해야 할 것 같은데, 군인에 의해 구출되는 장면에서 굳이 아리랑이 나와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메시지를 줘야 했을까요? 주인공이 아버지와 함께 노래 부르던 밀양아리랑도 아니고, 중간에 누가 부른 노래도 아니고 왜 하필 아리랑인 걸까요? 왜 아버지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반복한 걸까요? 중국인 위안부도 나왔는데… 왜 여성 개개인의 그 끔찍한 고통이 아니라 하필 민족으로 승화시키는 건가요…

심리치료 받아가면서 잠도 못자면서 영화 찍었다는 것도 끔찍해요.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 일이라며 누군가 소모된다는 것이 무서워요.


영화를 보고나서 더 정확한 토론이 되겠지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메시지는 할머니들이 받은 피해가 그녀들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문제라는 점의 표현이다. 민족주의적인 표현일 수 밖에 없는 그 표현이 나온건 할머니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부끄러운게 아니라 어린 아이들을 지키지는 못한 나라와 권력자들이 부끄러워 해야한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바로 세우셨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은 정확히 말하면 할머니들이 듣고 싶어 하셨던 말이다.

돈이든 대의든 직간접적인 강요해서 소모한 것이라면 매우 끔찍한 것이겠지. 그들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 너역시 예술가이니 알겠지만 그들이 하고싶어서 한 일에 대해서 옆에서 뭐라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적 강요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끔찍하다고 회피만 할 수도 없고 나는 끔찍해서 못하지만 타인은 다를 수도 있겠지...


솔직히 더 댓글을 달 자신이 없었다. 전의 포스트는 썩 잘 쓴 글도 아니었다. 분명 감정적인 글이었다. 차라리 왓챠에 달았던 댓글이 더 논리적이었다. 영화에서 여성문제와 사건의 폭력적 전시를 갖고 문제 제기했는데, 그 글에 대해 들은 평은 없고, 오로지 실제 사실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나보고 예술가라고 하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 예술가라고?


예술가, 난 예술에 속하는 학문인 음악에 대한 학위를 갖고 있다. 음악학사 딱 하나뿐이다. 그리고 악기 연주를 하거나 작곡, 편곡을 하기도 한다. 더불어 겉으로 보이는 나의 복장 역시 화려한 편이다. 거기에다 자아가 강해서 어디에 가든 충돌이 잦다. 언제나 끝까지 지지 않으려고 해서 더 충돌이 잦다. 그래서 그런가? 주변에서는 나를 볼 때 예술가로서의 인상이 강한 모양이다.

예술가라는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일까? 타인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는 인간일까? 타인이 하고 싶어서 한 일에 대해서 가만히 두는 인간인 걸까? 대의가 따른다고 뭐든 하는 인간인 걸까? 예술이 사회 안에서 예술 행위로서 기능하려면 창작자, 작품 공연자, 관람자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 평가하는 행위도 있다. 예술가는 타인의 예술 행위의 장단점을 분석하거나 문제를 제기하여 반면교사 삼을 기회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이해해야 할까, 예술가이기 때문에 문제를 더 제기해야 할까?

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문제를 더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직업은 직업윤리라는 것을 갖는다. 모두가 합의한 것이 아니어도 각자 직업윤리라는 잣대를 갖고 있다. 나는 목적을 갖는 예술의 존재를 인정한다. 단 그런 예술의 경우 “어떤 목적을 위한 예술을 한다면서 예술을 위해 목적이 되는 존재를 소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잣대로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그 예술에 외부적 목적이 있다면 중간 목표가 있을 것이고, 목표 달성을 염두에 두고 어떤 과정으로 할 것인지 고민이 있을 것이다. 일단 목적이 옳다면,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목표를 설정하든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 목표도 옳다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과정이 어떻든 문제가 없는 것일까? 오랜 시간을 진행하다 보면 목적을 잃고 표류할 수도 있다.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목표 역시 바르게 설정했다면, 그 목표를 위해 어떤 과정을 선택하든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래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작품과 소재를 적절하게 분리하려 노력해야 한다. 소재는 그 자체로 주제가 아니고, 수많은 요소 중 하나다. 소재가 집중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주제를 해치게 된다. 혹은 소재 자체가 목적이나 목표가 되면 소재를 전시하는 데서 그치게 된다. 만약 소재가 인간의 어떤 삶일 경우 재현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가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소재의 분리는 굉장히 중요하다.

목표 중 하나가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고발일 경우 소재의 전시는 고발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쉬운 방법이 된다. 그래서 예술가는 소재의 전시라는 쉬운 선택의 유혹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소재를 전시하지 않고 고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행위는 정말 어렵다. 하지만, 어렵다는 이유로 쉬운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미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길에 소재가 된 존재 혹은 소재를 다루는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다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행위일까?



- 내 비판은 당신의 마음을 판단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감상은 작품과 상호작용하는 주체적인 예술 행위이다. 사람에 따라 작품의 목적, 작품의 내용, 작품의 소재, 작품의 제작 과정 등 작품 안에서 관심을 두는 부분이 다르다. 또한, 살아왔던 삶, 신념, 평소 관심사, 계층 모두 다르다. 그래서 개개인이 작품을 감상한 후, 혹은 감상하며 상호작용하는 사이에 파생되어 나타나는 것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작품 자체가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고발이라는 데서 응원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나처럼 작품 자체가 비윤리적 행위를 전시한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민족적인 정서를 자극하여 민족의 치유에 중점을 두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나처럼 민족적인 정서로 개개인의 피해를 덮는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형태의 상호작용이다.

다른 의견이 나온 것은 똑같이 작품에 대한 다른 형태의 상호작용이 나온 것일 뿐이다. 소재가 된 사람이나 소재가 된 내용을 비난하는 행위가 아니다.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대부분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영화를 본 것은 그 공포에 대하여 전시하는 것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재가 된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기 위해서 본 것이다. 그들은 그 마음에 공감했기 때문에 더 불편해서 비판한 것이다.

나도 비슷하다. 그래서 감독의 표현 방법이 불편했다. 실화라고 해도 극영화라는 예술작품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내내 영화에 대해서만 지적했다. “영화가 실화를 포장하는 방식이 폭력적”이라고 느꼈고,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아픔을 민족과 가족의 아픔으로 포장”하여 “피해자의 아픔보다 국가와 민족의 아픔”으로 바꾼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 영화가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과 2015년 위안부 문제 협상의 폭력성, 밀양 집단 성폭력 사건에서 멋대로 합의해서 돈을 받아 탕진한 아버지의 폭력성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두 협상 모두 “개인에게 사죄하고 보상, 배상해야할 책임은 국가(일본)”에게 있고, “사과받고 배상 받아야 할 주체는 개인”인데, “국가(대한민국)와 민족이라는 공동체”가 멋대로 대신 받고 알았다 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 밀양에서 있었던 집단성폭력 사건 역시 친고죄 조항 덕에 합의 종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2차 피해뿐 아니라, 멋대로 합의해서 돈을 받아 가로챈 아버지가 있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비슷한 모습이다.

그런 협상과 사건들이 있었는데, 아직도 싸우는 분들을 두고 영화는 그 사건을 “상실감과 죄책감, 무력함으로 표현하면서 개인의 싸움을 돕기보다 분노를 분출하고, 개인을 삭히는 데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전쟁의 주체 자체가 공포인데, 전쟁의 주체만이 해결할 수 있는 양 표현한 것”을 보고 이후에도 이어지는 여성을 성적 도구화한 기지촌까지 생각나서 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없었다.

이건 내가 아는 것과 내가 겪은 것, 나의 사고방식에 의한 나의 상호작용이다. 위안부 피해자를 부끄러워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영화 때문에 더 상처받을 사람이 있을까 마음이 더 아팠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대리할 수 없다. 작품도 그들의 아픔을 대리할 수 없다. 작품의 관람도 그들의 아픔을 대리할 수 없다. 작품이 알려진다고 해도 그들의 아픔을 대리할 수 없다. 자칫 주체가 바뀌는 일이 생길까 두려운 것이 내 상호작용의 배경이다.

타인의 상호작용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영화를 보고 느낀 마음이 옳다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영화를 만든 과정을 보고 느낀 마음이 옳다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느낀 영화의 소재에 대한 아픈 마음이 옳다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를 이야기할 때 외적인 요소를 끌어오는 것은 소재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거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당신의 마음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1. 포스팅한 날짜가 아닙니다. 글을 오래 쓰다보니 글 쓰던 중에 기록한 날짜입니다. [본문으로]
  1. 얌마 2016.08.12 16:56 신고

    니가 그냥 관종인거야.

  2. ㅇㅇ 2018.06.01 12:52 신고

    위안부는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민족의 역사인 것도 사실.
    그것을 어느 방향에서 입각하여 본다 한들 개개인의 아픔이 희석되는 것도 아닌데, 굉장히 자기본위 적인 분석이시네요.
    애초에 다른데서 싸운 걸 댓글까지 퍼와서 이리 올리는 걸 보면 성격에서도 자기중심적인 부분이 엿보이고요.
    "내가 맞아"만을 주구장창 반복하고 있는 건 님도 마찬가지인듯.

    • 당연히 자기 본위적인 분석이지요. 원래 객관이라는 것은 굉장히 권력중심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입니다. 그래서 주관적 분석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주도적이지 않고, 객관적인 척으로만 생각하면 세상에 어떤 새로운 생각이 등장할까요?
      내가 맞다고 주장하기 위해 다양한 근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내세우지 않고 나만 맞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토론에서 문제지, 그게 아니면 뭐가 문제일까요?
      저는 아나키스트입니다. 민족 중심의 역사로 보았을 때, 민족이라는 거대한 공동체가 각 지역이라는 작은 공동체, 그 시대 특유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시각에서 바라본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방향에서 본들 개개인의 아픔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겠죠. 하지만, 민족주의적 해석이 경계되어야 할 것은 일본군 위안부 이후 미군기지 중심의 기지촌이라는 성매매 집결지를 국가가 묵인과 방관뿐 아니라 장려했던 것, 일본인의 기생관광을 묵인하고 방관했던 현대사까지 생각하면, 민족의 역사는 그들의 희생을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픔의 전시가 완전히 불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전시하는 방식의 폭력성, 그것을 전시하는 배경에서의 민족적 폭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민족성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대처했었나요? 병자호란 직후에는 환향녀에서 ♪♩♪♪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단어,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알면서도 쉬쉬했던 해방직후,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명목으로 민족의 일꾼이라면서 뒤로는 욕했던 기지촌, 관광산업으로 외화를 벌어들인다며 그대로 두었던 기생관광. 이런 배경이 있는 데도 내셔널리즘을 꼭 강조해야 하는 것일까요?

『엑스 마키나(Ex Machina)』가 아카데미에서 각본상 후보에 오르고 시각상을 수상한 기념으로 하는 포스팅입니다. 2015년 1월 24일에 쓴 글을 리뷰 겸 해서 포스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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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 마키나』는 상징으로 똘똘 뭉쳐 있다. 제목부터 이름, 내용까지 모두 상징으로 뭉쳐있다. 마지막에는 그 긴장과 상징을 행동을 통해서 전부 풀어준다. 덕분에 다 본 후에도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고, 안에서 풀어낸 이야기에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중간에 언급된 프로메테우스의 불(기억이 확실하지는 않다)이나, 오펜하이머가 해서 유명해진 말 등을 통해 더 많은 힌트를 얻어 즐겁게 볼 수 있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Ex Machina


Deus ex machina 에서 신(Deus)을 빼는 것을 통해 기계로부터 온 신이 아닌 극의 갈등 해결자를 암시한다. 더불어 니체의 말 “신은 죽었다”를 대신하여 극 중 신의 죽음과 새로운 가치인 기계 장체로 만든 인격의 등장으로 인한 갈등도 암시한다.


Nathan

이름의 뜻인 “신이 준”과 현재 상황이 문제 될 수 있음을 알려 통제하려는 예언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부여받는다. 동시에 입체적으로 신(Deus)의 지위를 받아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낸다. 네이든은 오펜하이머가 함으로써 유명해진 말인 “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말을 칼렙의 입을 통해 듣는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하기도 하는 오펜하이머를 통해 프로메테우스가 갖는 신의 지위만 이어받는다.


Caleb

이름의 뜻인 “개”, “신에 대한 헌신”처럼 신이 된 네이든에게 헌신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동시에 입체적으로 신이 아닌 존재를 사랑하는 지위를 부여받는다. 네이든에게 오펜하이머가 함으로써 유명해진 말인 “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말을 통해, 네이든을 신의 지위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은 프로메테우스가 갖는 신의 지위는 갖지 않고 신이 아닌 존재를 사랑하는 역할만 부여받는다.


Ava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이름의 뜻인 “생명”(신이 인간이 된 덕에 새로운 방식의 생명), 그 이름을 가진 최초의 여자인 “자유의지를 지향하는 인물”로서의 역할만을 부여받는 전형적 인물로 나타난다. 심지어, 연구소는 에이바가 움직이기 위한 원동력인 전력을 무선으로 받을 수 있게 하여, 에덴의 지위까지 얻는다. 단,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탈출하는 인물이다.


이렇게 뜯어보다 보니 A.I.에 관한 과학적인 면이나 여러 가지 소재의 언급보다 이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어쨌든 이렇게 이름을 짓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영화. 그리고 종교의 경전과 신화는 이야기의 보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 영화 『귀향』의 문제

며칠 전 영화 『귀향』을 봤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중간중간 눈을 뜨기 힘든 장면도 있었다. 그래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분들을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면서 계속 보았다. 같이 보자고 했던 여자친구는 나한테 미안해하고, 본인도 굉장히 힘들어했다. 내가 한동안 침울한 표정을 지었는지 내내 내 표정을 계속 신경 쓰며 본인을 탓했다. 나도 보려고 했던 영화라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계속 자신을 탓했다. 영화 자체의 문제인 건데…


- 문제1. 성폭력의 전시

영화를 보기 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생각과는 달리 현대와 과거를 오가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두 이야기가 병렬로 진행하는 줄 알았다. 끔찍한 일을 당한 피해자가 왜 굿당에 왔는지 이해할 수도 없기도 했고, 초혼을 통해 넋을 위로하기 위한 서사를 만들기 위한 것일 줄 알았다.

그런데, 현대의 소녀와 과거의 소녀가 끔찍한 폭력에 시달리는 장면이 등장했다. 현대에서는 칼로 더듬다 아버지를 찌르는 장면이었다. 일제강점기는 온몸을 후려치고 벗기는 장면, 단체 책임을 물어 강제로 옷을 벗게 만드는 장면, 강제로 섹스를 시도하는 장면, 초경도 않은 열네 살 처녀라고 실실대는 장면 등 끔찍한 장면을 너무 많이 등장시켰다. 최악은 카메라가 하늘로 올라가며 쪽방촌 전체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강간이었다. 스너프 필름을 모아서 동시에 전시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형태의 성폭력 전시는 무슨 의미로 한 것일까? 끔찍한 사건을 끔찍하게 묘사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공분할 일이니 잘 보고 제대로 분노하라는 것일까?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이 동시에 저런 연기를 해야 했던 것일까? 그 사람들은 정신적 상처를 입지 않을 자신이 있던 것일까? 아니면, 감독은 정신적 상처를 주지 않을 자신이 있던 것일까?


- 문제2. 군인이 끌고 가고 군인이 구출하는 서사

또 하나 끔찍했던 것은 일본 군인을 해치우고 소녀를 죽음으로부터 구출하는 장면이었다. 전투장면이 어찌나 유치하고 어설픈지 끔찍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장면의 끔찍함은 서사 구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본 군인이 납치해 가고 일본 군인이 관리하며, 일본 군인이 계속 이용하다 완전히 없애버리기 직전 구출하기 위해 나타나는 광복군(으로 추정)이라는 서사라는 생각이 든 순간 욕지기가 올라왔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인가? 그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서 구출하러 왔다는 대리 만족을 주기 위한 것인가? 그 와중에 소녀를 끝까지 죽이려는 일본군의 잔악함을 전시하며 구출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끔찍하게도 끔찍할 뿐이었다. 군인에게 당해 온 사람이 군인을 다시 만난다는 것 너무 폭력적이다. 이후 미군기지에 비슷한 기지촌을 묵인하고 한국을 부자로 만들자고 했던 군사정권 시절의 한국 정부를 생각하면 이 영화는 피해자를 농락하는 수준이다.


- 문제3. 굿의 과정과 결과

그래도 굿을 하며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내가 왜 마음을 다지는 노력을 하며 봐야 했는지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노력해서라도 피해자를 위한 마음으로 끝까지 보려고 했다.

영화를 보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굿도 우스웠다. 살아 있는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을 생각하면 살아있음 자체도 죄로 만드는 것 아닌가? 왜 하필 성폭력 피해자인 그를 신들리게 하여 성폭력 피해자의 혼을 씌운 것일까? 공통점이 있어서?


- 문제4. 아리랑과 민족주의

공통점을 굳이 따져보자면 강간을 당하다 아버지를 잃은 소녀는 강간당하고 나라 잃은 민족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개개인의 피해를 개개인의 처지로 다독이거나 구조적 문제로 나타나는 성폭력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뜬금없는 아리랑의 등장은 그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영화를 볼 때 들리는 아리랑은 그렇지 않아도 이제까지 듣던 아리랑 중 가장 역겨운 아리랑이었다. 민족주의적으로 그들의 아픔을 다룬다는 생각에 엄청나게 역겨웠다. 『디 워』의 아리랑은 부끄러워 미칠 것 같은 아리랑이었는데, 여기 아리랑은 아리랑과 민족을 역겹게 만드는 『디 워』보다 더 한 최악의 아리랑이었다.


- 성폭력을 다룬 다른 영화는 어떻게?

『귀향』을 본 다음 날, 오스카 이야기를 하다 다시 영화를 보게 되었다. 평소에 배우의 이름과 얼굴을 잘 기억하지 않아서 배우들 이름을 잘 모르는데, 몇몇 영화로 익숙한 마크 러팔로가 나오고 오스카 후보라고 해서 더 보고 싶었다. 마침 개봉했고 상영관이 있었다. 시놉시스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도 성폭력 문제를 다룬 영화였다. 그 영화는 『스포트라이트』다.


맥과 아이폰을 사용하다 보니 검색 도구인 스포트라이트를 먼저 생각했다. 그런데 스포트라이트는 그게 아니라 “보스턴 글로브”라는 언론의 집중 취재팀 이름이다. 『스포트라이트』는 이 집중 취재팀이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폭력 스캔들을 취재한 과정을 그린 실화 기반의 영화이다. 

전날 본 『귀향』과 다르게 한결 개운한 기분으로 나올 수 있었다. 찝찝하거나 불편한 구석이 별로 없었다. 피해자의 피해를 전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피해를 이야기할 때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여주되, 아동을 성추행하거나 강간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다. 사건과 가장 직접 관련된 영상이라고 해봐야 경찰서에서 기소하지 않는 장면일 정도로 피해자의 피해장면을 고발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 도구로 쓰지 않았다.


『스포트라이트』는 취재과정을 그렸기 때문에 전시하지 않을 수 있는 충분한 배경이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2013년 작인 『한공주』를 살펴보면, 얼마든지 선정적으로 그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공주』는 성폭력 문제를 피해자를 둘러싼 사람 위주로 다룬다. 강간 장면이 등장하지만, 『귀향』처럼 피해자의 신체를 불필요하게 전시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고통을 보여주어 감정의 당위성을 드러내는 것 역시 얼굴과 흔들림 정도로만 묘사하여 최소한으로 비춘다.

『한공주』라는 영화를 언급하다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이 영화가 영화관에 정식 개봉했던 2014년 밀양시 교육지원청에서는 각 학교 관리자에게 과장되게 밀양을 욕보이는 영화라며 교사들이 보지 않을 수 있도록 협조 요청을 한 적이 있다. 영화에 실제 사건은 더 큰 피해가 있었으나 영화에서는 축소해서 이야기했다는 식의 자막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왔던 나는 실제 사건은 더 굉장했고, 영화제 때는 모르겠지만, 현재 그런 자막은 들어가 있지 않으며 잘못을 인정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관람하자고 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내가 근무했던 학교에서 『한공주』와 관련하여 보지 말자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 밀양시 전체에서 그 보지 말자는 말은 거의 무시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 그러면 『귀향』은 성폭력을 어떻게 다루어야 했나?

그러면 『귀향』은 위안소의 성폭력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했을까? 별거 없다. 민족주의 빼서 다루면 된다. 더불어 군인이 납치하고 군인이 구출하는 서사가 아니어야 한다. 또, 굿을 할 때 신들리는 이가 성폭력 피해자이며 현장에서 아버지가 죽는 이야기를 없애거나, 충분한 개연성을 줄 필요가 있다. 스너프 필름 전시하는 듯한 쪽방 위안소 전체 묘사를 빼고, 인물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영화 전체가 문제라서 싹 갈아엎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성폭력을 관찰하는 것이 성폭력에 대한 2차 가해라는 것을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찬양이 좀 없어지고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 좋겠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 ㅉㅉㅉ 2016.08.12 16:53 신고

    이 생키는 시발 무슨 프로불편러인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삼부작은 슈퍼 히어로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크게 바꾸어 놓은 작품이다. 많은 사람이 그중 제일을 둘째 편인 다크나이트라고 한다. 마지막 편인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다크나이트에 비하면 실망스럽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실망스러운 수준의 작품도 아니고 형식적으로 훌륭한 마무리였다. 고전시대의 소나타 형식이 엿보일 정도로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잘 맞아 들어간 작품이다.

소나타 형식은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소나타 형식은 평균율을 바탕으로 한 까닭에 조성의 대비를 강하게 나타낼 수 있다. 또한, 화성 음악으로 만들어져 리듬과 가락이 명료한 까닭에 주제를 강하게 드러낼 수 있는데, 이는 주제의 가락을 두 개로 만들어 대비를 더 강렬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장점이 되었다.

소나타 형식의 첫째 부분인 제시부에서는 조성과 리듬, 성격이 모두 대비되는 두 개의 주제 가락을 제시한다. 제1주제는 주 조성으로 제시되며, 제2주제는 대비되는 관계 조성으로 제시된다. 둘째 부분인 전개부에서는 두 개의 주제가 쪼개지고, 대위적인 형태로 등장하며 전조가 잦아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재현부에서는 제시부의 주제가 같은 조로 함께 등장하며 웅장하게 끝을 맺는다.

다크나이트 삼부작은 소나타 형식에 거의 맞아 들어간다. 각 편을 부분에 대입하면 배트맨 비긴즈를 제시부, 다크나이트를 전개부,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재현부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격(character)의 대비를 나타내는 주제로 해석할 수 있는 인물(character)이 있기 때문이다. 고담이라는 어두운 도시를 배경으로 선한 인물인 배트맨과 악당의 대결이 항상 나타난다.


- 고담이라는 배경을 조성으로

배트맨은 고담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활동하는 히어로다. 고담은 범죄의 공포에 시달리는 도시이다. 배트맨은 고담에서 범죄자들을 공포로 제압한다. 이렇게 배경을 주 조성으로 보고, 이 조성과 가장 어울리는 공포의 상징 배트맨을 제1주제로 볼 수 있다. 배트맨은 범죄자를 공포로 제압하여 경찰에게 처분을 맡기며 본인은 심판하지 않는다. 오로지 악에 대해 공포로만 작용한다.

반대쪽에는 라스 알 굴과 리그 오브 어새신이 있다. 이들은 고담이라는 도시 자체를 악으로 보고 고담을 없애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담을 지키면서 심판하지 않는 배트맨과 대결하게 된다. 이렇게 제2주제로 보기 충분하다.


-제시부(배트맨 비긴즈)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공포의 상징인 어둠의 기사 배트맨이 탄생한다. 배트맨은 공포의 도시에서 공포를 극복하며 탄생했다. 리그 오브 어새신에게 수련을 받지만, 리그 오브 어새신에서 요구하는 살인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제시부에서 두 주제가 관계조(리그 오브 어새신의 일원)인데다 대비(살인 대 불살)를 주며 형식을 모두 충족한다. 더불어 배트맨과 반대편의 성격을 강하게 각인시킨다.


-전개부(다크나이트)

다크나이트에는 배트맨의 조력자로 정의의 검사 하비 덴트, 주 악당으로 조커가 등장한다. 하비 덴트는 배트맨의 조력자인데도 불구하고 직업이 검사이기 때문에 제1주제인 악에 대해 작용하는 공포를 포함하지만, 법을 통해 심판의 내용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제2주제인 심판 역시 나타난다. 이런 양면적인 성질이 있지만, 오로지 긍정적으로 가기 위해 양면이 똑같은 동전으로 무시하고 산다. 그래서 하비덴트는 전조 과정에 있는 제1주제와 제2주제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조커는 순수한 악으로 배트맨의 반대 성격을 가진다. 누구도 심판하지 않지만, 악으로써 모두에게 공포로 작용하고 살인을 쉽게 저지른다. 이는 배트맨의 완전한 반대면으로 제1주제의 전위(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가락)이자 제2주제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조커는 심지어 하비 덴트의 정신을 파괴하여 투 페이스라는 악당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는 하비 덴트의 양면을 더 드러내며 공포라는 조성으로 전조를 유도한다. 투페이스는 쉽게 살인을 저지르는 공포라는 제1주제가 변형된 상태에서 제1주제 쪽으로 전조된 제2주제가 합쳐지며 새로운 사건을 저지른다. 그렇게 조커와 함께 사건 전체를 동시에 움직이며 주제의 스트레토(주제가 짧게 끊어져 나오는 형태)처럼 나타난다.

다크나이트는 이렇게 제1주제와 제2주제가 변화무쌍하게 나타나며 분위기를 더 공포로 물들이며 각자의 기교를 뽐낸다. 전개부의 형식적 요건을 이렇게 충족시킨다.


-재현부(다크나이트 라이즈)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 비긴즈의 재현처럼 나타난다. 다크나이트는 악에 대한 공포와 도시의 구원자로 다시 등장한다. 더불어 도시를 심판하려는 자들이 다시 나타난다. 심지어 그들은 라스 알 굴의 리그 오브 어새신이다. 라스 알 굴은 없지만, 구원자처럼 나타난 베인과 탈리아 알 굴이 함께 있다.

다크나이트는 제1주제인 다크나이트는 다시 관계조인 리그 오브 어새신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도시를 구하기 위해 만든 원자로를 리그 오브 어새신에게 빼앗긴다. 그리고 척추가 부러지며 다시 리그 오브 어새신의 흔적과 합류하게 된다. 수장의 아이(the child)가 있던 감옥에 갇히는데, 여기서 수장의 아이처럼 공포를 극복하고, 공포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난다.

선한 사람처럼 나타났던 탈리아 알 굴은 주제를 구원할 것처럼 하다가 도시를 심판하려 한다. 이는 제1주제와 같은 조성으로 전조된 제2주제로 볼 수 있다. 결국 제1주제가 승리하며 끝을 맺고 주역은 사라지며 구원을 강렬하게 남긴다. 제1주제가 조성 싸움에서 승리했는데, 사라질 수는 없다. 그래서 그 흔적으로 로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 블레이크를 제2대 배트맨으로 만든다. 이렇게 코다를 제2대 배트맨으로 만들며 형식적 요소를 충족한다.


영화나 극을 전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처럼 음악 전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다크나이트 삼부작을 통해 이렇게 소나타 형식을 볼 수 있었다. 다른 형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면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다크나이트 삼부작 분석해놓고 보니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사단조가 생각났다. 소나타 형식의 악곡 중 질풍노조 사조로 만든 곡이면 대체로 어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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